[오프라인 모임] 영화 보는 사람들과 영화로 가득 찬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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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용기 낸 사람들이었다. 처음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내향적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곤 ‘우린 다들 용기 내서 만난 거다.’라고 했던 한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용기 낸 부분은 낯선 사람을 만나는 두려움보다 내 글의 익명성이 깨질까 덜컥 겁이 났던 점이다. 나는 내 글의 익명성이 좋다. 흔한 이름을 가진 덕분에 글쓴이가 나임을 특정할 수 없으며, 글 바깥의 나를 아는 사람이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본디 글과는 다른 사람이라 여긴다. 글을 쓸 때는 여러 번 고치고 검토하며 무게를 싣게 되지만 나는 글만큼 무거운 사람이 아니다. 말할 때는 ‘그게 뭐였더라. 그거.’라며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위해 스무고개를 한다. 이유를 설명하기 귀찮을 땐 ‘그냥’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리거나, 가벼운 농담을 진지한 대화보다 자주 하곤 한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유혹이 된다는데 그게 딱 나였으니, 글 뒤의 내 모습은 내 글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숨겨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영화 보러 가는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종종 혼자 영화관에 가면 나처럼 혼자 영화관에 와서 조용히 관람하고 조용히 나오는 사람이 많았다. 가끔 좋은 영화를 보면 그들 중 한 명을 붙잡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여태껏 살아오며 다양한 상황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고 얘기해 봤지만, 영화 관람에 있어서는 아예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함께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글만큼의 나를 보여줄 수 없더라도 궁금해해 왔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만난 영화 보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하루들은 영화로 가득 찬 하루들이었다. 영화를 보고, 영화가 끝나면 영화 이야기를 하고, 감상이 끝나면 또 다른 영화 이야기를 했다.
보통은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면 이런 식이 된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놀러 갔다가 생긴 일화를 예시로 들어보자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해운대 한복판에서 마주치고 방방 뛰며 좋아했다. 그렇게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고 뒤돌아서 길을 걷는데 누군가가 나를 붙잡고 물어봤다.
근데 누구예요?
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이요!
고레.. 뭐요?
아, 브로커 감독이요.
브로커요?
네, 아이유랑 강동원 나오는 영화요.
네?
아, 모르시는구나.
그러니까 평소 영화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면 나는 평서문으로 끝나는데 상대방은 의문문으로 끝나는 일이 잦다. 그러다가 대화가 뚝 끊기고 다급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흔들리는 동공으로 돌아오는 ‘네?’ 한 글자에 짧은 탄식과 함께 내뱉는 '아,'로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 이야기를 했다. 덕분에 더 이상 황급히 다음으로 넘길 주제를 찾지 않아도 됐다. 뿐만이랴. 일상과 영화를 겹쳐서 봐야만 할 수 있는 말들도 여러 번 들었다. 처음 모임이 있었던 날은 자신의 상황을 우디 앨런의 영화 속 상황에 대입하여 설명하시기도 했다. 아마 지나가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웠을, 우리끼리만 통했을 유머일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흔치 않을 이 대화들이 유쾌하게 다가왔다.
분명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일이 흔치 않다고 했는데 다들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열심히 맞장구쳐주었으며 또다시 천천히 이야기했다.
심지어 세 번째 만남에서는 무척 신기한 경험을 했다. 눈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눈이 마주쳤을 때 이 영화가 서로의 취향이 아님을, 영화관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말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곤 서로의 마음을 알아챈 뒤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영화에 대한 마음이 일치해서 웃은 것일까, 말하지 않아도 눈 맞춤으로 전해지는 이 상황이 재밌어서 웃은 것일까.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를 좋아하고, 그리고 함께 영화를 보고, 그러다 보면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 영화를 즐기는 데 한 가지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해석했다. 세상을 자신이 아는 영화에 빗대어 바라보기도 했다. 영화 속 장소에 가봤고, 영화 속 주인공이 먹었던 음식을 먹었다. 프랜차이즈 대형 영화관 말고도 작고 소박한 예술영화관 여러 곳을 누볐다.
영화제에 가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면 사람들이 다 영화 얘기를 하고 있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영화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이 모임도, 영화를 좋아하고 그걸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으며 종일 영화와 관련된 무언가를 했기에 오프라인 모임이 있는 날은 나름의 작은 영화제였다.
세상엔 나 말고도, 나와 함께 영화를 보러 다니는 친구들 말고도,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참 많다. 좋아하는 걸 공유하는 일은 좋아하는 걸 더 열심히 좋아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영화 모임 덕분에 혼자였다면 보지 않았을 영화들을 보고, 가지 않았을 영화관에 갔다.
요즘에는 댄스 학원에서 만난 사람과 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혼자였으면 신청하지 않았을 또 다른 스타일의 댄스 클래스를 신청하게 됐다.
아하, 좋아하는 건 함께 할 수 있을 때 더 확장될 수 있구나.
그런 깨달음과 함께 당분간은 또 열심히 익명성을 지키겠지만, 또 어느 순간 다시 좋아하는 것을 나누기 위해서라면 다시 과감히 글 앞으로 나와 볼 결심을 한다.
[이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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