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부유하기 -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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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꾼 장자는 의문했다.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이 나비가 꾸고 있는 꿈에 불과할 수 있다고. ‘나’라는 존재가 또 다른 시공간에서 다중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발상. 다른 차원에 대한 상상이기도 한 그의 질문은 오늘날에 이르러 평행 세계, 멀티버스 따위의 말들로 활발히 설명되고 있다. 각 개념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 이외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물리학자의 낮잠>은 그러한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는 연극이다. 작품은 물리학의 개념을 차용하여 단일한 우주가 아닌 여러 우주가 공존하고 교차하는 세계를 그려낸다. 물리학도를 꿈꾸는 학생 차연과 자신이 물리학도였다고 주장하는 기억을 잃은 노파. 마치 장자와 나비 같은 두 인물은 시공간은 다르지만 서로의 옆에 공존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연극 초반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차연과 노파의 서사는 같은 인물의 과거와 미래라는 암시를 풍긴다. 멀티버스라고 하기엔 다소 평면적인, 즉 선형적인 시간에서 재현되는 것 같은 연극의 질서는 점점 붕괴된다. 다른 시공간에서 같은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고, 시공간이 통합된 듯 모든 인물이 나란히 대사를 읊는다. 극을 이끌었던 이야기의 인물, 서사, 관계가 변형되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펼쳐지다가 모든 것이 한 순간의 꿈이었던 것처럼 갈무리 된다.
‘단일 우주’ 관점에선 완전한 모순인 극의 전개는 ‘다중 우주’ 관점에선 흥미로운 가능성의 집합이다. 홈리스인 인물이 기자가 되고, 괴팍한 노파가 선량해지고, 이혼한 부부가 영원을 약속하고, 여성에게 했던 고백이 그대로 남성에게 전해지는 또 다른 세계.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하지 않게 되는,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가 당연하게 되는 세계. 그 속에서 현재의 모습은 유일한 결과가 아닌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해 보인다.
이러한 멀티버스가 가능해지는 것은 우주의 ‘변수’ 때문이라고 차연은 설명한다. 아직 밝혀내지 못한 변수 사이에서 다른 질서를 가진 세계가 무한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극의 서사는 바로 이 ‘불확실성’이라는 맥락 안에서 긴밀히 통합된다.
차연은 “단 한 줄의 방정식으로 우주를 설명”하려고 한 아인슈타인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물리학은 우주라는 세계를 설명하고, 그럼으로써 그곳에 속해 있는 자신을 규정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차연과 노파 역시 극 전반에 걸쳐 ‘나’와 세계를 규정하려고 노력한다.
물리학도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길 원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언어’다. 언어는 문자 기호(language)를 넘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맥락(context)을 포함한다.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겐 각자의 세계를 대변하는 고유한 언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차연에게 물리학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언어였던 반면 다른 인물에겐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방귀’ 같은 소리였던 것처럼.
각 언어는 공통되는 부분도 있으나, 대개는 특수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나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언어가 누군가에겐 들어본 적도 없는 외계어일 수 있다는 사실. 이는 멀티버스 가설의 핵심 개념인 ‘거품 우주’와 비슷하다. (우주는 하나의 거품 형태이며 엄청나게 많은 거품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이때 모든 존재는 오직 자신이 속한 세계만을 인식할 수 있다)
가령 현재 나를 구성하는 주요한 언어는 자연, 젠더, 섹슈얼리티, 공허, 농담 따위와 관련된 말과 행동이다. 이런 맥락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무척 많고, 그들과 나는 인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전혀 다른 질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과 관계를 맺을 확률은 무척 낮지 않은가. 인간의 삶은 이미 어느 정도 멀티버스의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주목할 것은, 자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필요한 언어를 습득하는 게 철저히 불확실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당장 지구라는 행성에서도 20세기와 21세기에 인식할 수 있는 언어에는 차이가 있고, 어떤 공간에 속하느냐에 따라 동시대에도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지 않는가. 하물며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질서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곳이 나에게 더 적합하다면? 지금 인식하고 있는 내가 과연 전부인지, 또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지 의문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인지가 실은 매우 우연적으로 결정된다는 가설은 그런 면에서 해방적이다.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상상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꿈꿔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꿈으로만 머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더없이 허무한 진실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에 대한 인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동시에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단순히 이론에만 머무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을까.
문득 멀티버스를 현실화하려는 시도는 정의와 공정을 논하는 담론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티버스는 또 다른 ‘나’의 가능성이고, 현실에서 또 다른 ‘나’는 새로운 언어를 찾을 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멀티버스의 가능성은 곧 언어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안타깝게도 언어 사이엔 위계가 존재한다. 어떤 것은 쉽게 발견되고 체화될 수 있는 반면, 어떤 것은 각고의 노력을 동반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언어 역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 가시화되거나 은폐되고, 때론 차별과 처벌까지 동반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페미니즘에, 퀴어가 퀴어 이론에 접근하는 것이 물리학에 접근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처럼. 결국 멀티버스를 실현한다는 건,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를 적극적으로 해체하는 일과 같다. 누구든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에 접근 가능해야 하는 것. 그것이 멀티버스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가 그 구성원에게 제공해야 할 가능성이다.
개인으로서 ‘나’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도 반드시 필요할 테다. 그와 관련하여 노파는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인 비밀을 읊조린다. 주변부가 아닌 자기를 기억해야 한다고. 뭔가 계속 기억하려는 나 자신, 주체가 중요하다고.
그녀가 말하는 중심부와 주변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차연에겐 모든 것을 이해시켜 줄 것 같았던 물리학이 어느새 주변부적인 언어로 전락한 것처럼 그 역시 불확실성에 근거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감각을 설명하는 언어 역시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끊임없이 좇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살아가는 것. 인간에게 내장된 시스템은 그것만이 전부일지 모른다.
결국 나의 감각이 자연히 이끌리는 방향, 그것만이 근거다. 어쩌면 수많은 가능성을 보여준 극의 전개는, 노파가 순간순간 이끌렸던 감각들을 쫓아간 결과로 나타난 단 하나의 현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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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건 부유하는 것이라고 느끼곤 한다. 어딘가에 확실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자꾸만 의심하게 된다. 그건 꿈을 꾸는 감각과도 비슷한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또 다른 세계의 존재인 것은 아닐까. 그 가능성이 나에겐 더 맞지 않을까.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지난한 탐구를 통해 인간은 무엇을 얻고 싶은 걸까. 아무 것에도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그저 오늘을 부유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다.
[정해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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