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이라고 사람 냄새가 나는 건 아니야 -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 [공연]

글 입력 2024.11.0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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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봤다. 사람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관심을 가질 매력적인 제목의 연극이다. 우리 모두 사람이며 인간이라 묘하게 슬퍼지는 제목이기도 하다. 반박할 자신은 없다. 우리는 살면서 인간의 악한 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뉴스 속 사건 사고 그리고 우리 주변에 혹은 나의 모진 모습을 발견했던 사람이라면 제목에 반대 주장하긴 어렵다. 이것이 좋은 로봇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나온 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제목은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 영어로 Humans are good, Homospiens are bad이다. 호모사피엔스, 생각하는 사람은 나쁘다. 사람과 인간이라는 단어의 분위기 차이는 영어로도 미세하게 전달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모순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비슷한 단어들과 상반되는 서술어의 조합.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모순을 창작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눈으로 귀로 확인하고 싶어서 극장을 향했다.

 

*


구름은 있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 사람을 좋아하기 적당하게 맑은 날이었다. 어떤 이야기로 인간을 싫어하게 될까 궁금함을 않고 극장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았을 때 예사롭지 않은 무대 구성을 발견했다. 큐브 형태의 선만 남은 조형물이 무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크기가 다른 네 가지 큐브 안에는 카메라가 같은 색의 탁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기술을 활용한 공연일 거라는 생각에 시작 전부터 기대가 차올랐다.



IMG_9100.jpg

 

 

연극은 모든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며 시작했다. 미래와 현재를 넘나드는 5개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연극으로 내용마다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존재했지만 모두 무대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집중했다. 5개 이야기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전환할지에 대한 궁금했는데 무대 정면에 보이는 화면을 활용해서 책의 장을 안내하듯 소제목이 등장했다. 그것들은 간단했지만 분명 연극을 보는데 좋은 표지가 되었다.


이미 연극을 더욱 집중하기 위해 간단한 공부를 하고 갔으나 소제목을 보니 더 이야기를 파악하기 유용했다. 그 때문에 연극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켜지자마자 기억나는 대로 가장 먼저 적은 것은 소제목들이었다.

 

 

1. 지니는 카메라

2. 엄마는 메텔

3. 침팬지와 사람

4. 옛날 연극을 보았다

5. 이나, BA

 

 

사실 관람을 준비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부분은 과연 이야기를 정해진 시간 동안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였다. 이번 연극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는 2022/23년에 공연했던 같은 극단의 전작 < A · I · 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 >의 인물별 서브 텍스트 작성 과정에서 출발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고 보지 못한 극이라 시작할 때 진입장벽을 느꼈다.


감사하게도 극은 예매 상세페이지에서, 공연 전에 받은 팜플렛으로, 공연 중 배우들의 대사로 세계관을 관객들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도록 전달했다. 간단하게 키워드만 전달하자면 '기후 위기' '인간의 사회정치체계를 구역별로 구분' '시스템 작동이 잘 되어 생존율이 높은 1구역' '생존율이 낮은 2구역' '국가 경계 밖 3구역' '인공지능로봇 A · I · R(약칭 에어)가 인간이 기피하는 자리를 대신'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을 알고 공연을 보러 가서 그나마 마음을 놓고 시작했지만, 솔직히 이 세계관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적용되었다고 느껴지는 에피소드는 2개뿐이었다. 두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관련성이 더 높은 듯 보였지만, 내용 자체는 모두에게 어느 정도 새로운 이야기였다는 점이 전작을 보지 못한 관객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다른 관객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모두가 높은 집중력으로 관람했다.


연극은 친절한 듯 친절하지 않았다. 자료 화면을 보여주고, 대사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는데 연극을 모두 보고 친구와 내뱉은 첫마디는 '어렵다'였다. 우리가 분명 수학 문제를 풀고 나온 건 아닌데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친절한 설명으로 대사와 몸짓을 포함한 연기로 이야기를 전달했지만 여전히 제작자와 관객 사이에 정보의 격차가 있던 것인가 싶은 생각이었다.

 

* *


역설적이게도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연극이었다. 더 이해하고 싶은 연극이었기에 어려웠던 만큼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먼저 누가 '에어'였을까이다. 공연 내내 가장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인물들 각자 개성 있는 행동을 특정 상황마다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언어인가 생각했다. 계속 지켜본 결과 '감정' 혹은 '스트레스'를 참아야 할 때 에너지가 느껴질 만큼 격하게 움직였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자의식이 생긴 인공지능로봇 지니를 대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분명 내용으로 보았을 때 계획하지 않은 자의식을 갖게 된 지니를 상부에 보고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하는 내용이 나온다. 의논하는 두 존재는 사람일 텐데 감정을 소리로 표출하기보다는 누구도 해하지 않고 본인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특정 행동을 보였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도 핵연료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원들은 인간으로 추정되는데 온 힘 다해 달리는 행동으로 밖으로 표출하고 싶은 감정을 대신하여 표현한다.


왜 그들은 인간임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까, 무엇이 그들의 감정을 억제하게 만드는가를 생각해보았다.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 그들은 사실 '에어'인 것이다. 작품의 시작이 되는 전작은 '에어'가 인간이 기피하는 자리를 대신하는 세계관이다. 근미래에는 무엇을 기피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앞 이야기처럼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을 기피한다면 그 자리를 '에어'에게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책임감을 느끼는 모든 일에 '에어'가 대신한다면 인간이 일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모든 일에는 각 선택에 대한 책임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들이 조작을 통해 의도적으로 아무런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이다.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더 기버: 기억 전달자>에서는 매일 아침 약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곳을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또 다른 영화 <이퀄스>가 있다. 이곳의 사람들도 모든 감정이 통제된 채 사랑이 범죄가 되는 세상을 산다. 두 영화의 인물들 모두 감정을 느끼지 않게 조작되거나 느끼더라도 표현할 수 없도록 통제받는 사람들이다.

 

<더 기버: 기억 전달자>는 매일 약물을 스스로에게 주입함으로, <이퀄스>에서는 감정을 느끼는 '버그'가 발생했을 때 치료제를 주사함으로 감정을 통제한다. 만약 '에어'가 존재하는 연극 속 세계도 감정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사람 또한 로봇처럼 감정을 절제, 통제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했다면, 이들이 감정을 느끼더라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그 에너지를 행동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있다.


 

[포스터] 극단 이와삼_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jpg


 

다음으로 이 연극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5개의 에피소드는 근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현재적인 감각과 미래적인 감각이 공존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마인드 업로딩으로 재현된 엄마 로봇이 보여주는 모드 변경에 따른 사랑 방식의 변화처럼 실제보다 발달된 기술들이 등장하지만,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미래의 이야기 같으면서 현재 우리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인다.


처음 연극을 보러 갈 때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는 나, 즉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연극을 다 보고 나니 '로봇'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요소가 그들이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지 생각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다른 로봇에 대한 이타주의를 보여준 인공지능로봇 지니의 입장에서, 두 번째 이야기의 딸 수나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고자 변화하는 엄마 로봇의 입장에서, 다섯 번째(마지막) 이야기에서 이나 곁에 유일하게 남은 인공지능로봇 반려 앵무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시도를 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자신의 소설 <아이, 로봇>에서 제시한 원칙인 '로봇 3원칙'이 작품에서 설명된다. 그 원칙에 따르면 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부작위로써 인류가 해를 입게 두어서도 안 된다(제0원칙).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도 안 되며(제1원칙),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제2원칙), 로봇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제3원칙).

 

그들을 작동하도록, 살아가도록 프로그래밍한 존재는 인간이다. 로봇은 자신에게 명령하는 인간과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물론 '보호'를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연결한다는 게 부적절할 수 있다.

 

그럼에도 첫 번째 지니 이야기에서 그의 명령에 따르는 다른 로봇은 자신이 지니의 명령을 따르는 이유를 '너를 사랑하니까'라고 답변했다. 마지막 이야기의 인공지능로봇 반려 앵무새는 이야기의 끝에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이나의 곁에 늘 머무르며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유일한 존재로서 역할했다. 이러한 보호라면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프로그래밍이 된 결과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인간을 싫어하는 이유는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로봇을 만든 인간은 폭력적이고, 변덕스럽고,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사랑'이 인간과 로봇을 구별하는 상징적 요소로 말하지만 현실은 로봇보다 사랑에 더 서툰 모습을 보인다. 거창한 것이 아닌 기본적인 사랑의 방식을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더 잘해낸다.

 

지니가 다른 로봇이 방을 나가도록 명령하도록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명령하는 인간의 모습(첫 번째 이야기), 수나의 엄마 데이터로 마인드 업로딩을 했음에도 자신이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노력에도 사랑을 변덕스럽게 계속 거부하는 수나의 모습(두 번째 이야기), 10대의 딸을 집에 두고 생일도 안 챙기고 전화로만 연락하며 얼굴 보러 오지도 않는 이나 부모의 모습(마지막 이야기)을 보면 말이다.

  

* * *

 

우리는 인간이 곧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아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한국어에는 '사람 냄새'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말샘에 따르면 이는 인간다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태도나 분위기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인간은 사람인데 과연 인간은 모두 사람 냄새가 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답하고 싶다. 하지만 이 연극을 보며 느낀 나의 감상은 '과연 그럴까'이다. 연극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가 정말 잘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싶은 부분은 로봇의 입장으로 연극을 보게 되었다는 것과 로봇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 냄새가 나는 로봇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답게, 인간이 사람답게 살려면 태어난 모습에 안일함을 느끼면 안 된다고 깨달았다. 타고난 환경에 안주하면 안 된다. 언젠가 연극처럼 인간보다 온기가 느껴지는 로봇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들보다 사람다움,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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