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을밤 쓸쓸함 한 스푼, 희망 두 스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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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기온이 더 떨어지기 전에 가을을 완전히 느껴보고 싶다. 겨울에 날씨가 추운 건 계절이 주는 당연함 때문인지 서운하지 않다. 하지만 카디건 하나 걸치기에 좋은 가을이 어딘가 매서우면 그건 서운하다. 그 서운함을 더 느끼기 전에 가을이 오면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한다.
샤프(Sharp) - 연극이 끝난 후
기타와 함께 경쾌한 느낌을 주는 도입부를 거쳐 보컬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나온다. 이내 들리는 가사는 음악만큼 경쾌하지는 않다. 어딘가 감도는 씁쓸함과 공허함을 안겨 준다.
40년 전에 나온 노래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도입부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가사에서 느끼는 동질감은 이 곡을 찾는 이들이 많다는 말에 신뢰성을 더한다. 감상 후기에는 저마다의 추억과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있다. 노래 한 곡 들었을 뿐인데 여러 감정을 끄집어낼 수 있게 도와주다니 단연 명곡 중 명곡이 아닐까 싶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무대에 남아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본 적이 있나요
이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 무대를 볼 때와 객석을 볼 때다. 보는 시선은 달라져도 느끼는 감정은 같다. 모든 게 끝난 상황은 객석이든 무대든 똑같이 허전하고 쓸쓸하다.
삶을 하나의 연극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나아질까. 무대 위의 배우만이 화려하고 찬란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객석의 관객도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긴다. 그리고 연극 한 편이 끝나면 배우든 관객이든 모두 다 쓸쓸하고 허전한 건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삶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나를 제외한 모두의 삶이 빛나 보이고, 타인의 것이 부러워지는 순간에도 ‘나’를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모두 주변 인물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반짝이고 저마다의 이유로 똑같이 공허하다. 그저 주어진 연극 무대를 마음껏 즐기다가 그 공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비록 그 무대의 주인공이 내가 아닐지라도, 나는 객석의 앉아 있는 수많은 관객 중 하나일 뿐이라도.
모브닝(MOVNING) -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나를 눈물짓게 할 테니까
또 괜한 기대를 하면 서운하니까
제목 그대로 가사의 내용도 이와 비슷하다. 가사 속 화자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은 언젠간 나를 눈물짓게 할 테니까 라고 말하며 감정을 절제한다. 가사를 곱씹다 보면 틀린 말 하나 없어 씁쓸하기도 하다.
상대와 가까워지고 사람이 좋아지면 본능적으로 기대라는 것을 하게 된다. 내 마음의 크기와 상대의 크기가 같기를 바라고 내가 해주는 만큼 돌려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라는 말처럼 그 크기가 뜻대로 다가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실망한다. 그래서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다. 기대한 만큼 상처받는 사람도 늘 자신이고 그 감정에 책임지고 견뎌내야 하는 사람도 자신밖에 없다.
얼핏 보면 사랑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계속 사랑을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혹은 아주 작은 것들에서도.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어본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논리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사랑에 상처받는 만큼 사랑으로 치유 받는다. 겨울의 차가움이 어서 지나가고 다시 봄날의 따스함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랑은 혹독함 속에서도 다시 따뜻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기어이 찾아낸다.
가을방학 -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만약이라는 두 글자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가을에 들어야 그 쓸쓸함과 쌀쌀함이 온몸으로 다가온다. 떠나간 이에 대한 그리움과 그 속에 담긴 추억을 함께 담아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상에서 흔히 할 수 있는 것들이자 이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나가면서도 떠난 이의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진 않는다. 내색하진 않아도 일상을 더는 함께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작은 것들에서부터 사람의 부재를 깨닫는다.
가사를 들어보면 남녀 간의 이별로 다가올 수 있으나, 사실 이 노래는 작곡가가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신의 형을 추모하며 만든 곡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부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할 수 없음을 감각하며 마음 한편에 여전히 크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떠나간 이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보지 않는 것과 영영 세상을 등진 것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에 가사의 첫머리 ‘만약이라는 두 글자가 오늘 내 맘을 무너뜨렸어.’라는 의미는 살아내는 일상을 가정하며 그 사람의 빈자리를 채워낼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한다. 그 슬픔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한다.
잔나비 – 슬픔이여 안녕
어릴 적 유람선을 탔던 기억을 떠올리며 곡을 써 내려간 가수는 슬픔이 오가는 모습을 유람선에 빗대어 표현한다. 슬픔이 오고 가는 모습이 꼭 그 반대편 유람선 사람들 같았기 때문이랬다. 거대한 유람선이 사람을 가득 태우고 넓은 바다에서 한없이 멀어져 가도,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면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슬픔이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손을 흔드는 정겨운 모습과 연결한 이유는 무엇일까. 계속될 것 같았던 슬픔도 한 계절이 지나거나 바람 한 번 불면 그저 슬픔 아는 빛으로 피어날 뿐이니까.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만큼 멀어져 간 배가 이내 돌아와 사람들을 제자리로 데려다주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그런 내가 또 좋아지고
자꾸만 아른대는
행복이란 단어들에
몸서리친 적도 있어요
옛 선인들의 말에서도 그렇듯이 인생은 순환의 과정이다. 기쁜 일이 오면 곧 그것을 잃는 슬픔이 오기 마련이지만, 슬픔 뒤엔 항상 기쁨도 함께 온다. 이 말을 이해하게 되면 곧 가사가 단순 변덕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다. 행복이란 두둥실한 의문에 끝내 답을 못하게 되더라도 그 고민만큼 삶에 대한 의지가 충분히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이제 슬픔이라는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여 슬픔 뒤 또 다른 내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손을 들어 슬픔을 정겹게 껴안아 보자.
“저 봐 손을 흔들잖아. 슬픔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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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라면, 음악은 우리 삶의 기억을 일깨워주는 책갈피일지도 모른다. 이미 보았던 부분일지라도 다시 보고 싶어 사이에 끼워놓는 것처럼, 노래를 들으며 느꼈던 감정과 시절을 온전히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가을이 지나고 늘 그랬듯이 겨울이 다가오면 또 어떤 곳에 책갈피를 꽂게 될까. 아마 그때 펼쳐본 세상은 각자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다.
[이지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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