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혜화의 작은 극장, 씨어터 쿰에서 SF 옴니버스 연극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를 보았다. ‘사람은 좋다’는 말은 사실 두 가지 뜻이 있다. 그의 성격, 인성 됨됨이는 좋다. 그리고 정말 말 그대로 사람을 좋아한다. 사실 전자 먼저 떠올랐으나, 뒤에 이어지는 ‘인간은 싫습니다’라는 말에서, 그리고 SF라는 소개에서 후자의 뜻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과 인간은 단순히 순우리말과 한자의 차이가 아니다. 언뜻 보면 같은 존재를 칭하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르다. 아니 꽤 다를지도.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사람과 인간의 정의는 첫 번째(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와 세 번째(일정한 자격이나 품격 등을 갖춘 이) 뜻은 공유하지만, 나머지 뜻은 다르다. 사람에는 뜻이 일곱 가지나 있는데 인간은 세 가지밖에 없기도 하고.


사전을 더 파고들면 재밌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많겠지만, 지금은 이쯤하고 그냥 쉽게 떠오르는 이야기만 하겠다. 학문을 다룰 때는 한자어를 애용하는 습성 때문일까, 인간이라는 단어는 주로 과학적인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자연스레 다른 종과의 비교할 때도 사람보다는 인간이라는 표현을 쓴다.


침팬지와 우리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는 주로 ‘침팬지와 인간’을 비교하지, ‘침팬지와 사람’을 비교하지는 않는다. 우리를 닮은 고지능 로봇을 만들 때는 ‘사람을 닮은 로봇’을 만들기보다는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든다. 외계인과 싸울 때는 ‘외계인과 인간’의 대결을 다루지, ‘외계인과 사람’의 대결을 다루지는 않는다.


사람은 인간이 인간들 속에만 있을 때 쓸 수 있는 표현이고, 사람이 그 테두리 바깥의 존재들을 만난다면 그때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

 

 

[포스터] 극단 이와삼_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jpg

 

 

돌고 돌아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로 돌아가 보자면, 아까도 말했지만 SF 옴니버스 연극이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고(봐라, 여기서는 사람보다 인간이 어울린다) 사회는 세 구역으로 갈라진 미래 배경 에피소드 4개와,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에피소드 1개가 있다.


2022년 공연되었던 이라는 극의 서브 텍스트에서 출발한 극이며, 그 극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기도 한다. 따라서 해당 세계관을 공연 초반에 아주 간단히 소개해 준다. SF에다가 옴니버스 구성인 데다가 뿌리가 되는 세계관까지 따로 있다 보니 여러 애로사항이 눈에 띈다. 상황 설명이 많이 필요한 만큼, 극 안에서 자연스레 전개하기보다는 관객에게 줄거리를 요약하며 직접 설명하는 연출이 많다.


그런 부분이 아쉬웠지만, 이 고민은 극을 꾸려나가는 사람들도(여기서는 사람. 여기서 인간이라고 하면 내가 인간을 흉내 내는 외계인이거나 인간과 나를 구분 지어 생각하는 정신이상자 같을 것) 충분히, 아니 그들이 훨씬 더 많이 했을 테다. 그들의 고민과 노력 덕에, 한계 안에서 최대한 재밌게 상황을 설명하는 방식을 여러 번 볼 수 있었기에 오히려 흥미롭기도 했다.


옴니버스 형식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 요소 중 하나는 구조물의 사용이었다. 큰 뼈대 구조물 하나가 무대를 꽉 채우고 있어 저 커다란 코끼리 같은 것을 안고 어떻게 옴니버스 무대를 꾸미는지 궁금했는데, 에피소드가 바뀔 때면 배우들이 직접 구조물을 옮겨 새로운 환경을 만든다. 음악과 조명에 맞추어 단체로 움직이는 그들을 보면 꼭 안무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전 다른 연극에서 무대를 재정비하는 시간은 쉬는 시간, 혹은 지루한 시간이었는데 이 극에서는 이 또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KakaoTalk_20241031_155736491.jpg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성에 관한 고찰이라는 흔한 표현으로 정리할 때, 몇 가지 에피소드는 그 주제에 정확히 들어맞지만 몇 가지는 직관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도 같다. 기후 위기가 닥친 상태에서 평등한 세계를 위해 고집을 부려야 할지 소수를 위한 선택이라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가난한 배우 친구의 캐스팅 부탁이 못났다고 생각하더니 정작 자신은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에게 일자리를 요청하며 똑같은 짓을 하는 극작가의 이야기.


이 두 에피소드에서는 인간 외의 다른 존재(이 세계관 안에서는 인공지능 로봇)가 조명되기보다는 그저 사람 사이의 외적, 그리고 내적 갈등이 다뤄질 뿐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인간성에 관한 고찰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이야기들을 하기에 앞서 다른 에피소드에서 이미 우리가 로봇과의 조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옴니버스 속에서가 아니라 그냥 외부에서 저 이야기들을 각각 만났다면 그것은 그저 과학자, 그리고 예술가의 고뇌, 다시 말해 사람의 고뇌가 되었을 테다. 하지만 우리는 이전의 에피소드에서 로봇의 고뇌를 경험했고, 이후 만나는 사람의 고뇌는 사람의 고뇌가 아니라 인간의 고뇌로 다가온다.


‘인간 너머의 관점으로 인간 다시 보기’, 이 극이 직접 말하는 주제다. 사람과 인간의 차이가 다시 드러난다. 인간 외의 다른 존재들과 더부살이를 하게 된 세상에서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 그런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런 세계에서 나는 내가 인간임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길 고집할 것인가? 또는, 저들마저 사람임을 받아들이고 나 또한 사람으로 돌아갈 것인가?

 

 

 

김지수_아트인사이트컬쳐리스트.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