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쯤, 삶을 산다는 건 결국 최선의 방법을 찾고, 최선의 크기를 계속 넓혀가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논리를 세상에 대입해보면, 지구에는 80억 가량의 삶의 주체, 즉 개인이 존재하기에, 이 세상엔 80억 개 모양과 정도를 가진 최선이 생긴다는 거다. 과장해서 80억 개의 다른 모양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건데, 각기 다른 최선들은 충돌할 것이며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순리다. 그리고 어떨 땐, 타인을 위해 나의 방식을 재정비하거나 크기를 키우게 되기도 할거다. 다른 최선을 가진 누군가를 위해서. 하지만, 완벽한 이해는 존재할 수 없다. 어차피 우리는 타인이 되지 않고서야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 해결책이 된다. 궁극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각자의 최선의 방식과 기준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난 후, 첫 번째로 인정하게 된 상대는 엄마다. 부끄럽지만 나는 20살까지만 해도 세상에 엄마가 모르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플 땐 어떤 약을 먹고 어떻게 쉬면 되는지, 떨어진 단추를 어떻게 다시 새 옷처럼 붙여두는지, 내가 어떤 거짓말을 하는지, 내가 얼마만큼 최선을 다하는지까지 모두 다 알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사람이었기에, 세상에 엄마 같은 전지전능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 엄마는, 나의 최선의 크기가 엄마가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들을 하고는 했다. 실수를 가장한 고의처럼. 나도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그 말들에 상처를 받고는 했고, 마음에 두고 두고 담아 칼을 갈듯이 갈아왔다. 가장 나를 잘 아는 엄마가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꼭 집을 뛰쳐나와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겠다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 때의 엄마가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걸 인정하게 된 후부터는 그 말들과 기억을 태워서 뿌렸다. 엄마 나름대로 엄마의 세상에서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나를 키웠을 것이며, 내가 가장 최선의 길로 걷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를 독립적이고, 안정적이고, 위협 받지 않는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25살이 되고, 엄마도 어느 정도 나를 독립적 성인으로서 인정하게 되면서는 나도 나만의 최선을 견고히 하고,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의 최선을 찾아가는 중이다. 서로를 대하는 최선의 방식을 찾기도 했고.
영화 <레이디 버드>는 이러한 맥락이 모두 담겨 있는 나의 인생작이다. 나에게 인생작은, 마치 나의 추억 한 장면에 깊숙이 박혀 빠지지 않는 것만 같은 영화다. 가장 모두의 최선과 엄마와 나의 이야기까지 한번에 담겨 있는 영화. 특히, 옷 가게를 가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이 씬은 마음에 통째로 박혀서 가끔씩 머리 속에 튀어나올 때가 있다.
"엄마가 나를 좋아해주면 좋겠어"
"널 사랑하는 거 알잖아, 난 네가 언제가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기를 바래"
"이게 내 최선이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
엄마와 크리스틴의 중심 서사 말고도, 레이디버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과의 서사를 쓰는 중이다. 언제 길거리에 나앉을지도 모르는 집안의 상황을 홀로 책임지면서도 크리스틴에게 가장 최선의 것을 해주고 싶은 엄마.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크리스틴의 첫 남자친구, 아들을 잃고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는 연극부 선생님, 크리스틴의 학비와 집안 생계를 위해 은퇴 후 새로운 직장에 면접을 보러 다니는 아빠까지.자신의 최선의 방식을 알아가고 키워가는 중이다. 어떨 땐 갈등하고, 어떨 땐 자신의 최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맞춰나가기도 하면서.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 밖에 없는 혼란과 고통을 겪고 또 흔들리면서, 최선을 담아낼 그릇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