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어 마땅한 자는 죽어야 하는가 - 살인자ㅇ난감 [드라마/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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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ㅇ난감 스틸컷 / 넷플릭스 제공
"아저씨 뭔가 죽어 마땅한 짓 한 적 있지 않아요? 분명 있을거에요."
- 원작 프롤로그 중 이탕이 지검사에게
들어가며
살인자ㅇ난감. 발음하기 애매한 형태의 제목이다. 살인자이응난감. 살인자오난감. 살인장난감. 등 사람마다 읽는 방식이 가지각색이다. 작가도 발음의 형식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나는 독자가 부르고 싶은 대로 읽어달라는 것이 이 제목을 지은 작가의 의도라 생각한다.
참고로 나는 이 제목을 살인자난감이라 읽는다. 중간에 낀 이응을 생략한 것인데 ‘살인자가 난감해 한다.’ 라는 문장이 이 시리즈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인자 같은 강력범죄자 주제에 난감이라니. 벌레만도 못한 자가 느끼기에는, 난감은 꽤나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살인자에게 살해당한 희생자가 무고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넘어 살인보다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천인공노할 말종이었다면. 살인자는 한순간에 범죄자에서 정의를 실현한 히어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살인을 용인하는 것은 반인륜적인 사상이겠지만, 사회 기사면의 댓글창으로 분노를 쏟아내는 이들과 웹툰이자 드라마, [비질란테]와 오늘 다룰 [살인자ㅇ난감]의 흥행을 통해 대중들이 원하는 위험한 욕구를 현실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살인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지만, 범죄자들이 편안히 여생을 보내는 것도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두 가지 욕망. 이런 마음들이 결합되어 대중들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범죄자들에게 천벌이 내려지길 희망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두 가지 현상으로 분화되는데, 활발한 사형제도 부활에 관한 논의와 관련 주제를 다룬 컨텐츠의 흥행이다.
그리고 컨텐츠는 픽션과 논픽션. 두 가지 형태를 모두 포함하게 된다. 몇 달 전, 유튜브를 통해 밀양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들의 신상이 유포되어 국민의 비난세례가 집중되었던 사례를 논픽션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범죄자들의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2010년 연재되었던 웹툰, [살인자ㅇ난감]이 올해 넷플릭스 시리즈로 재구성되었다. 14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작품이 다루는 주제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건재하다. 아기자기한 –주제와 다르게 웹툰의 화풍은 매우 귀엽다- 그림의 웹툰과 그것을 세련되게 연출한 드라마 시리즈를 면밀히 살펴보자.
살인자ㅇ난감 스틸컷 / 넷플릭스 제공
무결한 사람은 과연 존재하는가 [스포주의]
주인공 이탕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중년 남성과 시비가 붙고, 결국 망치로 남성의 머리를 타격하게 된다. 그는 즉사했고 이탕은 하룻밤 사이에 살인자가 되었다. 불안감에 떨며 살아가던 이탕은 자신이 살해한 남성이 살인과 강간을 상습적으로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범죄자를 처단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에서 해방되려는 찰나, 한 여성이 이탕의 범행도구인 망치를 들고 편의점을 찾아 이탕을 협박하고, 협박을 이기지 못한 이탕은 그녀를 살해하게 된다.
그렇게 이탕은 연쇄살인마가 되고, 이 사건들의 전말을 파헤치려하는 장난감형사와 또 다른 살인자인 송촌이 등장하여 엉키고 설키는 것이 [살인자ㅇ난감]의 주요 내용이다. 여기서 핵심은 작가의 의도하에 이탕이 살해한 인물은 과거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등장인물인 이탕은 의도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극 초반에 살인을 주저하던 이탕이 범죄자를 직감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능력에 취해 점점 살인마로 변모하는 내용의 드라마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숨겨진 이면에는, 죽어 마땅한 잘못과 그렇지 않은 잘못을 자연스럽게 병렬해 보여주며 수용자로 하여금 잘못의 정도를 무의식적으로 가늠하게 한다.
작품은 인물들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 행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수용자에게 불쾌감을 선사한다. 살해당한 범죄자들의 범죄이력과 더불어 친구의 MP3를 훔치고 후배와 바람을 핀 과거가 있는 이탕, 가정이 있지만 퇴폐업소에 드나드는 –웹툰 한정- 동료형사. 그리고 가장 깨끗할 것으로 묘사되었던 장난감형사 마저도 부패경찰의 아들이라는 설정을 부여하였다. 열거된 사례 이외에도 대부분 등장인물들은 지저분한 과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잘못을 죽어 마땅한 것과 눈살이 찌푸려질 뿐인 것으로 구분하여 수용자에게 제시한다.
즉, 이러한 과거를 수용자들에게 제시하면서 작가는 그들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 작품을 보는 당신은 강력범죄자가 아닐 확률이 높겠지만, 다들 한번쯤은 경미한 잘못을 저질렀지 않았겠냐고. 그러나 자신은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작가의 물음에 반박할 필요는 없다. 잘못을 탓하려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직시시키려는 것이다. 정확히는 세상을 이루는 구성원. 나와 타인, 그러니까 모두가.
살인자ㅇ난감 스틸컷 / 넷플릭스 제공
죽어 마땅한 사람은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진짜 죽어 마땅한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던 이탕은 조력자인 노빈을 만나 자신의 능력 –범죄자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 을 깨달은 뒤, 철저한 계획에 의해 살인 행각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중 이탕은 자신처럼 범죄자들을 골라 살인하는 선배 살인마 송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탕과 송촌은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송촌은 대상이 저지른 범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 심지어 어른에게 무례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대학생들을 납치해 죽이는 짓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송촌의 등장으로 작품의 주제는 명확해진다. 과연 사람이라는 존재가 죽어 마땅한 사람을 판별할 기준과 능력이 있는가. 우둔하고 가소로운 사람에게 생명을 재단할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물음. 극은 이 질문을 같은 살인자인 이탕이 송촌의 살인행각을 보고 혐오를 느끼는 형식으로 재현한다.
게다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그것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치명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사형 제도의 부활을 외치는 사람도 그 부분에서는 깊은 고심에 빠질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탕에게 천부적인 능력을 부여한다.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 범죄자를 특정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감이나 우연 따위가 아니다. 작품 세계를 만든 작가에게 부여받은, 쉽게 말하자면 이탕이 신의 대리인으로 설정된 것이다.
작가는 이탕의 능력을 통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인간의 영역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작가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도 동조하는 것도 모두 저마다의 가치를 지닌다. 논쟁은 여전히 뜨겁고 댓글 란은 시끄럽다. 당연히 결론이 쉽게 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는 것 대신,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려 한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자의 천벌을 원한다. -사형을 떠나서- 그러나 그 천벌을 행하는 주체가 자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권한을 부여받은 대리인이 나서서 그들이 행한 잘못을 그대로 되갚아 주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대리인을 자처할 존재, 혹은 대리인의 권한을 부여받을 존재는 누가 될 것인가. 창작물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존재에 대한 탐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미리 생각해보자. 이상적인 대리인 즉, 심판자가 과연 존재할까. 그리고 과연 그러한 존재가 필요할까. 머리가 더욱 복잡해지겠지만 사형제도 찬반에 앞서 꼭 필요한 숙고라 생각한다.
[김한솔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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