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증발

글 입력 2024.09.0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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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 : 액체의 표면에서 분자간 인력을 끊을 수 있는 입자가 분자간 인력을 끊고 기화하는 현상이다. 정상 상태의 액체 내부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분자간 인력을 끊을 수 있는 입자가 끓는 점에 도달하기 전에는 외부 압력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나무위키, '증발'의 정의

 

해외 생활을 끝내주게 하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찾아온 한국에서의 삶은, 마치 잘 설계된 황무지에 온 것 같다. 이상하게도 증발해버린 하루. 자고, 또 잤다. 비가 와서 찌뿌둥하다. 더는 생각하기 싫어서 뒹굴고 뭉그적댔다.

 

엄마가 출근하시는데 오늘따라 강아지가 발악하며 왈왈 짖고 슬퍼했다.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안절부절못한다. 엄마를 영영 잃어버린 것처럼 운다. 이미 출근길로 향하셨고, 9시간 뒤에야 퇴근한 엄마를 만날 텐데 강아지는 세상이 없어진 것처럼 울부짖는다. 안쓰러웠다. 그 모습이 꼭 나 같아서. 나는 엄마가 9시간 뒤에 올 걸 알지만, 강아지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시간의 길이를 인식할 수가 없다.

 

시간의 절대적인 총량을 보내야만 다시 만날 텐데. 강아지는 그걸 모르고, 사람인 나는 안다. 아니, 어쩌면 나도 몰랐는데 강아지를 보며 문득 깨달은 걸 수도 있다. 강아지도 나도 그 속절없는 기다림을 보내야 한다.

 

기다림에만 정신을 죄다 쏟아버리면 우울해질 테니 정신적으로 환기가 필요해. 비가 추적추적 내리지만 강아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여름철 비를 철철, 뚝뚝 맞아가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나도 강아지도 눈물인지 빗방울인지 땀인지도 모르게 흠뻑 젖어버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씻기고 털을 말리니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오늘은 너에게 빌린 카메라를 보내는 날이다. 난생처음 이별 택배라는 것도 보내게 되는구나.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지금 시기에 천천히 주려고 했는데. 이제는 네가 사는 곳으로 택배를 보내달라는 톡을 받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엇이든 깔끔하게 관리하고 다루는 네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 뽁뽁이 완충재를 감고 또 감싼다. 휘휘 감고 테이프를 또 돌돌 말았다. 혹시라도 카메라와 부품들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며. 빌려준 카메라 외에도 네가 예전에 쓰다가 내게 선물 차원에서 양도해 준 스마트 워치도 택배 상자에 함께 담았다. 비싸기도 하고, 앞으로 부지런히 쓸 것 같지 않아서. 그걸 손목에 감으면 꼭 네가 감았던 촉감을 다시 감각하게 될 것만 같아서. 내 방에서 덩그러니 쓸모없이 있는 것보다는 다시 잘 쓰이겠지 하는 마음에 같이 담아 보냈다. 구질구질하게 편지 같은 건 보내지 않았다. 원래 사람 마음이란 게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증거들을 같이 보내면 더 멀어지고 싶잖아.

 

택배를 보내고 나니, 이제 정말 우리 사이가 끝났나 서글퍼진다.

 

예전에 동아리에서 같이 좋은 추억을 보냈던 언니가 연애 1년 만에 결혼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결혼식 나흘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청첩장을 주겠다고 하여 만나러 갔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에게는 이미 뱃속에 아이도 생겼다. 얼떨결에 시간이 맞아 처음 보는 예비 신랑분과 인사하면서 셋이서 오손도손 밥을 먹었다.

 

언니와 예비 신랑분은 작년 5월에 처음 만나서 1년 후인 지금 7월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 아이가 생겨서 물론 책임감으로 인해 결혼을 더 빨리 결정했겠지만, 인연도 참 인연이었나 보다. 나는 너랑 3년하고도 5개월을 더 만나고 이렇게 작별을 고했는데, 어떤 인연은 완벽한 타이밍과 운과 때에 맞게 백년가약을 맺기도 한다. 그것도 1년이 지나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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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람의 인연, 그중에서도 배우자가 될 인연은 정해진 걸까. 언니네 커플은 두 사람이 직업도 똑같고, 직장도 똑같고, 심지어 형제자매분들의 직업마저도 다 똑같아서 비슷한 점이 참 많았단다. 같이 있는 모습이 너무 편안해 보이고 좋아 보였다. 부부를 넘어 이미 부모가 된 사이기에 더 끈끈한 에너지가 느껴진 거겠지.

 

너랑 나는 결국 서로가 그저 시절 인연으로 남는 건가. 누군가는 때가 맞아 바로 결혼하는 걸 보니 집에 돌아오는 길에 또 눈물샘이 고장 나서 혼이 났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한 우리가 결국 서로의 손을 놓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게 새삼스레 허망하고 허무하기만 하다. 서로 미워한 모습이 마지막이었다면 차라리 후련했을 거야. 그런데 마지막 기억이 가장 행복했던 추억만으로 이뤄져서 더 미어지게 마음이 아프다.

 

사랑의 결실은 만난 시기와 타이밍, 삶의 궤적으로 성숙해진 정도, 운, 때, 그 밖의 그 모든 것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깊어지기 전에 밀쳐낼걸. 내가 애써 “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라"라고 할 때 그냥 가지 그랬어. 그때 왜 굳이 만남의 명을 늘렸던 거야? 사랑은 이기적이라는데 너도 네 마음이 다할 때까지 나를 옆에 두었던 것을 보면 참 이기적이야. 행복한 최근의 기억들만 남기고 홀연히 떠나갈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마음을 깊이 주지 말았을걸. 넌 우리가 팔팔 끓기 전에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기화했구나. 증발해버린 그 마음은 후련하니.

 

내가 알지 못하는 다음 챕터의 시간들이 절댓값을 건너뛰고 그냥 불쑥 찾아오면 좋겠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가도 쓰라리고, 다시 돌아올 거라는 희망 회로를 돌리다가도 영영 못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깨지 못하는 긴 꿈을 꾸는 것 같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과 이제는 남보다 더 먼 사이가 되었다는 게 인정하기 힘들다. 큰 소리 한 번 안 내고 아름답게 헤어졌지만, 아름답기는 무슨. 이렇게 얼얼하고 손가락을 도려내듯이 고통스럽기만 하잖아. 나를 미워하는 게 두려워서 더 만나기 힘들다는 그 말이, 매일 밤 마음을 후벼파고 갉아먹는 칼로 남았다.

 

고등학교 때 <윤리와 사상> 과목에 죽고 못 살았지. 그래서 이별에 허우적거릴 때마다 교과서를 다시 펼치게 된다. 기억에 남는 이론 중 인상적이었던 스토아학파의 이야기를 다시 펼쳐서 읽어본다.

 

“스토아학파에 의하면 외적인 사건은 인과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므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으며,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건에 대한 내적인 태도와 의지뿐이다.”

 

스토아학파는 결과와 무관하게 해야만 하는 행위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걸 의무라고 하였단다.

 

나의 의무는 무엇일까. 너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내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 뒤도 돌아보지 말고 주어진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는 것?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어 그렇게 뛸 힘조차 없다.

 

지금은 한 템포를 쉬어가야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홀로 이 땅에 두 발을 뻗고 서있어야 할 것 같다.



 

[진유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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