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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초연부터 2018년 앵콜 공연까지 진행한 연극 <이방인>이 6년 만에 삼연으로 관객을 맞았다. 초연부터 유료 관객 점유율 95%를 기록했던 <이방인>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잇는 극단 산울림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연극 <이방인>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가 집필한 소설 ‘이방인’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이방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양하게 재현되었지만, 극단 산울림이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원작의 예술성과 문학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다. 임수현 연출은 “산울림표 ’이방인’은 문학성을 가지고 가려고 했다. 대중이 이 소설을 오랜 기간 좋아하고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문학성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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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산울림표 ‘이방인’을 직접 보니, 원작의 문학성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극의 중심이 되는 뫼르소의 독백 장면이었다. 원작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는 소설인 만큼, 독자는 모든 것을 뫼르소의 시점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극은 관객과 배우가 확실히 존재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어떻게 장면을 연출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연출 방식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런데 산울림의 ‘이방인’은 뫼르소 중심의 일인칭 서술을 원작의 문체에서 거의 바꾸지 않고 내용만을 압축한 채 그대로 가지고 갔다. 이 때문에 산울림표 ‘이방인’이 오히려 연극의 매력과 원작의 문학성 모두를 챙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활자 속에 갇혀있던 뫼르소의 생각과 말을 배우의 목소리로 직접 들으니, 감정의 전달력과 언어의 힘이 극대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의 백미는 단연 감옥에서 뫼르소가 자신이 혼잣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부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여러 달 만에 처음으로 나는 내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나는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내 귓전에 울리던 그 소리임을 알아차렸고, 그동안 줄곧 내가 혼자서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뫼르소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던 말이 사실 모두 뫼르소의 혼잣말이라고 깨닫게 된 그 충격은 역시 활자로 읽는 것보다 배우의 목소리로 직접 귀로 듣는 것이 배로 더했다. 또한 뫼르소와 부속 신부의 대화도 배우의 목소리로 접하니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심드렁하고 무감각하게 세상을 관조하던 뫼르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속 신부에게 죽음과 삶에 대해 감정적으로 말하는 장면은 연극성과 결합해 그 감정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소설 ‘이방인’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의 부조리와 억압적인 관습을 고발하는 알베르 카뮈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은 수만 번이고 재해석되고 재현되는 것이므로, 연극 <이방인>은 관객에게 고전을 읽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연극 <이방인>을 통해 새롭게 느낀 것을 ‘이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극을 보면서 다시 한번 절감한 것은 뫼르소가 겉보기에는 무감각한 소시오패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현재와 감각에 충실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뫼르소는 계속 자신이 함부로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데, 동시에 그를 둘러싼 인물들은 그에게 ‘당신을 이해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오히려 뫼르소에게 더 이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고 많은 일이 일어나는 세상을 감당할 수 없어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만다. 그러나 타인의 일에 무관심하다고 무례하게 굴지는 않는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지만, 나를 떠나는 사람을 굳이 붙잡지도 않는다. 관객은 자신과 닮은 뫼르소에게 자신을 이입하다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자 ‘이해’하려 노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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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법정에서 왜 아랍인을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쐈냐는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해서 비웃음을 산다. 태양은 극에서 계속해서 죽음과 함께 언급된다. 그는 태양 때문에 어지러움을 느끼고, 극도의 피곤함을 느끼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어디를 가더라도 인간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태양의 이미지로 연극에서 나타난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처럼 인간은 언제나 인간을 보고 있다. 검사로 대표되는 한편의 현대인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뫼르소를 어떻게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난한다. 또 변호사로 대표되는 다른 한편의 현대인은 뫼르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호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한 편의 연극 같다는 생각을 하며 모든 비난과 변호에 반항한다. 그렇게 모든 ‘이해’를 거부한 뫼르소는 결국 누구를 이해하지도 않고, 동시에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렇게 이방인이 된 그는 부조리한 죽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평생 자신의 삶만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생 누구도 완전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고,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도 없다. 하지만 이기적인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삶으로 타인을 이해하려 하고, 또 모순되게도 완전히 이해받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삶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그 죽음 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삶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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