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유 : 뮤지컬 '비밀의 화원' [공연]
-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세계는 매력적이다.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맞이한 주인공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대단한 능력으로 상황을 타개하기도 하고, 어쩐지 호의를 보이는 멋진 조력자를 만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자신보다 더 자신을 사랑해 주고, 또 사랑하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고, 모두가 우러러볼 만한 멋진 업적을 세운다. 판타지든, 로맨스든, 동화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난과 역경을 뚫고 마침내 찬란한 행복을 마주한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다. 이야기가 존재하기 전과 존재한 후의 현실은 전혀 다르지 않고, 이야기의 독자인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펼쳐, 상상력을 펼쳐
뮤지컬 <비밀의 화원>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랜시스 버넷의 소설 『비밀의 화원』을 원작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이다. 1950년대 영국 요크셔의 성 안토니오 보육원을 배경으로 하여 에이미, 비글, 찰리, 데보라 네 명의 아이들이 이야기를 이끈다.
공연은 '오픈데이'를 하루 앞둔 날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오픈데이는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어른들이 보육원에 방문하는 날로, 보육원의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가족을 찾을 기회와도 같다. 나이가 찬 네 명의 아이들에게 이번 오픈데이는 더더욱 특별하다. 보육원을 떠나기 전 후원자나 가족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오픈데이이기 때문이다. 에이미와 비글, 데보라는 예쁘게 미소 짓는 법을 연습하고, 보육원을 청소하고, 깔끔하게 몸단장하며 희망찬 미래를 상상한다.
그런데 찰리는 조금 다르다. 이제까지 아무도 자신들을 데려가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부족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 같은 아이들을 원하지 않을 거라며 날 선 말을 던지는 찰리에 아이들은 침울해 한다.
이때 에이미가 꺼낸 것이 바로 소설책 <비밀의 화원>이다. 에이미는 어릴 적 즐겨 했던 '연극 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연극 놀이는 각자 책 속의 인물이 되어 대사를 읽고 연기하는 놀이였는데, 보육원을 퇴소하고 모두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 놀이를 더 해보자는 것이다.
에이미는 서툴고 앙칼진 소녀 '메리'를, 비글은 동물들과 친한 '디콘'을, 데보라는 친절한 수다쟁이 '마사'를 담당하며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고, 찰리도 마지못해 몸이 약해 까칠한 소년 '콜린'의 역할을 맡게 된다.
혼자서 외롭지 않는 법
소설 속의 메리는 부모님을 잃고 미셸스웨이트 저택으로 보내진다.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이 고팠지만,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이 자란 메리는 주변 사용인들에게 윽박지르는 법만 알고 있었는데, 다정하지만 강단 있는 마사의 도움으로 홀로 스스로를 챙기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배워 나간다.
이후 저와 닮은 울새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마사의 동생 디콘을 만나 함께 미니어넷을 심어보기도 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메리는 본인처럼 외로웠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더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는 콜린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역설적이게도, 홀로서기를 연습하고서야 함께하는 법도 알게 된 것이다.
이야기의 힘
공연 애호가를 자부하는 나는 나름대로 공연을 자주 관람하는 편이고, 좋아하는 작품은 소소하게 회전문을 돌기도 한다(같은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는 행위를 ‘회전문 관극’이라고 표현한다). 100분 남짓하는 시간동안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세계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이야기에 푹 빠질 때 느껴지는 몰입감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렇게 외부와 단절되어 무언가에 몰입하기를 즐기며 극장을 찾는 사람은 사실 현실도피를 원하고 있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현실에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겪는 성장과 변화에 대리만족을 느끼고, 그에 중독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향유하는 방식은 소설도 있고, 영화도 있고, 드라마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이야기를 즐기고 있는데, 그들을 모두 현실도피자라고 말하지는 않지 않나.
하지만 여기서 의미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왜 극장에 갈까? 내가 공연을 보러 감으로써 얻기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던 지난 봄, 나는 뮤지컬 <비밀의 화원>을 보기 위해 정동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이야기는 쓸모없다며 연극 놀이를 피하던 찰리에게, 에이미와 데보라가 건넨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환상적인 이야기를 보고, 듣고, 연기하고, 몰입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내 인생에도 그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적인 소망은 어느 정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잠시 이야기 속에서 울고 웃는다고 하여 현실의 내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까? 그 환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어떨까. 약간의 희망, 약간의 긍정이 내 마음속에 피어났다면?
허상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좇는 것일지라도 그걸 위해 지금의 내가 당장 삶의 태도를 바꿀 결심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변화가 아닐까. 연극을 하면서, 연극을 좋아하면서 같은 의지를 가진 이들을 만나고 곁에 둘 수 있게 되었다면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메리가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얻은 에이미나, 연극놀이를 하며 쌓은 친구들과의 우정이 너무 소중했던 데보라, 그리고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깨달음을 얻은 나처럼 말이다.
결국 내 의지, 내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과 같은 작은 변화가 현실 속의 마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앞으로도 열심히 이야기를 사랑하며, 내 삶에 크고 작은 마법을 불러오기로 결심했다.
내게 깨달음을 주었던 뮤지컬 <비밀의 화원>은 2024년 8월에 정동극장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찾아온다. 화원에 들러, 현실 속에서 마법을 찾는 방법을 배워보길 모두에게 권해본다.
이 세상엔 많은 마법이 있어.
하지만 사람들은 그게 뭔지 몰라서 쓸 줄도 모르는 것뿐이야.
아마도 마법의 시작은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계속 말하는 걸거야.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날 때까지.
프랜시스 버넷, 『비밀의 화원』 中
[장유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