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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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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가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과거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이후에 지하철 시트 소재가 불연재로 바뀌었고,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 이후에 대형 건물의 스프링클러 시스템 확보와 고층 건물 옥상의 헬리패드 확보가 의무화되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무거운 시설들이 저층에 설치되었고,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재난안전법이 개정되고 국민안전처가 신설되었다.


그러나 국민안전처는 3년을 채우지 못하고 행정자치부에 편입되었고, 참사는 여전히 일어난다. 법은 사전예방적이기보다 사후 처리 적이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참사를 예방하기 위해서, 나라도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남겨진 자의 책임이자 잊힌 자의 유산.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현재 나의 안전을 지켜준 과거의 희생에 대한 빚을 조금이나마 탕감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내 생각과 비슷하게, 남겨진 자들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는 극. <새들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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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무덤>은 주인공 오루의 일생을 연대기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미 어른이 된 오루가 새를 따라 처음 따라간 과거는 1968년 군사정권 시대. 오루의 다섯 살 때다. 마을에서는 돼지를 누가 죽일 것인지를 두고 싸우고 있다. 과거 포악했던 지주가 죽임을 당한 후 그 영혼이 돼지에 깃들었다고 믿어, 이 돼지를 죽이면 흉사(凶事)가 끝날 것으로 생각하는데, 죽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지 걱정되어 서로 미루는 것이다.


그런데 악의 축인 돼지를 하루빨리 죽이지 못한 이유가 있었으니, 사실 그 돼지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돼지를 죽인다고 하면, 덩치가 크고 우람한 그 돼지의 씨를 받고 싶어 밤에 몰래 내려오는 사람들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영혼이 깃든 돼지의 씨가 계속 내려오고 있어져 이 포악한 영혼을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죽이는 것마저 서로의 탓만 하다 미뤄지는 것이다.


대를 끊어야 하지만, 이기적인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척결되지 않는 것. 보면서 친일파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독립 이후에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친일파의 잔재는 독립한 지 79년이 된 지금에도 남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굴레는 친일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개인의 욕망과 탐욕 때문에 청산되지 않는 나쁜 시스템과 대물림되는 악습, 끊어낼 수 없이 더욱 단단해지는 욕망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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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굴레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과거 악랄한 지주를 죽였던 오루의 할아버지는, 지주가 없어지자, 본인이 배의 주인으로 같은 마을 사람들을 똑같이 괴롭힌다. 자신의 아버지임에도 그런 행태를 참을 수 없어 아버지에게 대들었던 오루의 삼촌 수필은 자신이 그 자리에 앉자, 현대로 이어질 때까지 더 냉정하고 계산적인 자본가가 된다.


수필이 활개 치는 그 마을이 싫어 마을을 떠난 수필의 친구 판수와 오루는 우연히 서울에서 다시 만난다. 판수는 서울올림픽을 위해 재개발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 타인의 주거를 파괴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그런 판수의 공장에서 일하며 돈도 받지 못해 억울한 노동자였던 오루는 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적엔 파산 위기에 처한 공장의 사장이 된다.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었는데도 바뀌는 건 없다.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의 굴레는 여전히 존재한다. 현대에 와서도 그렇다. 최저를 보장하는 제도와 법률이 생겨나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는 듯하다. 오히려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선과 악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그러니 완전한 착취의 얼굴을 하지 않은 착취가 만연하게 깔려있다. 시스템과 구조의 개선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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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이 개인만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사실, 이 극에서 나오는 상대적인 자본가의 모습을 띠고 있는 수필, 판수, 오루도 결국 다른 시스템에서는 하청 노동자일 뿐이다. 큰 시스템에서 보면 프롤레타리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서로를 겨누고, 싸우고, 속이고, 뜯어 먹는 것이다. 군사정권 시대에서는 빨갱이라 칭하며, 초고속 경제성장 시대에서는 서로를 속이며, 광주 민주화운동에서는 서로를 겨누며. 그리고 서로를 갈라치기하고, 공격하고, 몰아세우는 것은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말이 있다. 얼핏 보면 이 극은 오루 한 사람 개인의 일생을 서술하는 것에 그쳐 보이지만, 사실 그 한 사람의 인생이 근현대사 전체를 다루고 있다. 군사정권 시대에 빨갱이로 몰려 파도치는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형과 그를 사랑했던 누나를 보았고, 서울 올림픽 시절 무력이 오가는 재개발 시절을 경험했고, IMF 외환위기로 자식을 얻은 날 압류 딱지를 받았고, 세월호 침몰로 딸을 잃었다.

 

그러나 잊고 살았던 기억도 많다. 잊는 걸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 모든 걸 기억하고 매일을 살아갈 수는 없다. 오루도 잊는 것을 강요당했다. 어른들은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부모님이 새섬에 갔다고 했다. 이를 들은 후, 오루는 새섬을 볼 때마다 부모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새섬을 볼 때마다 복합한 감정을 느끼며 말수가 적어지고 바다를 똑바로 보기 어려워졌다.


그런 오루에게 어른들은 부모의 영혼이 떠돌고 있다며 굿을 했지만, 빙의한 무녀의 몸으로 오루의 부모님이 전한 대사는 다름 아닌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 다 같이 묻혀 있다고. 마을 개발 사업을 위해 시체 인양을 제대로 시도해 보지도 않고 대충 무마하려는 오루의 삼촌 수필에게, 마음을 담아 우리를 보내주라고. 줄줄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기에, 우리만 이렇게 마음 편히 올라갈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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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마음과 감정의 짐을 평생 같은 무게로 떠안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살아야 하니까. 그러나 완전히 잊고 살 수도 없다. 그 사람의 삶까지 내가 살아야 하니까. 잊힌 자들 사이에서 기억하는 이는 영원히 서 있다. 기억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자 정치적 선언. 개인의 삶을 넘어, 정치적 울림에까지 닿을 수 있는 삶의 노래.


남겨진 자의 눈에는 떠난 자의 그림자가 늘 비치고 있다. <새들의 무덤>을 통해 오루의 눈에 비친 그림자를 우리는 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 모두도 각자의 눈에 비친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오루를 통해 우리는 그 그늘에서 기억의 빛을 잃지 않고 앞으로의 아픔으로 도약해 나가는 힘을 느꼈다.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를 마음속에 새기며, 가끔 그 그림자가 희미해질 때면 새섬에서 기억의 새가 다가와 줄 것을 믿으며. 그렇게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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