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게, 연인에게, 여운에게

그 모든 마음을 담아, 윤희에게 (2019)
글 입력 2024.06.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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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축된 서사는 양날의 검을 지닌다. 독자들이 스스로의 상상력을 보태어 다채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 있도록 이끄는 한편, 인물 간의 관계 및 감정선의 온전한 이입에는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해석의 여지가 가장 다양한 매체인 영화에서는 함축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에 따라 여운의 정도가 결정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랑의 내용보다 본질과 깊이에 집중하며 적지 않은 생략을 감수한 영화 <윤희에게>는 어느 농도의 여운을 품고 있을까.

 

 

 

관람자로서의 미학


 

<윤희에게>는 느린 속도로 진행되면서도 주인공들 사이의 사연을 찬찬히 짚어주지 않는다. 청소년 시절 서로를 사랑했고 이별했다는 사실은 두 여성이 주고받는 편지의 내용에 드러나 있지만,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와 같이 첫 만남과 관계 발전의 과정을 보여주는 과거 회상 장면은 전혀 없다. 두 사람이 관계를 정리하고도 한참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사랑의 계기를 비롯해 연인 사이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직접 상상하게 된다. 필자 역시 이 영화를 처음 관람했을 때는 드러나지 않은 내용에 대한 궁금증이 앞섰던 것 같다. 그러나 온전한 독자의 입장에서 관망하고 대사를 되새기며 깨달았다. <윤희에게>는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작품이다. 직접 윤희 또는 쥰이 되어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영화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한 시절을 향한 그리움에 젖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우리는 윤희와 쥰이 어떤 비애의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걸어왔는지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깊은 연대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서로의 가장 충만했던 시절에 존재했음을 안다. 한 순간도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별을 통보했을 때, 타지로 떠났을 때,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때, 반복되는 꿈을 외면하지 못해 결국 편지의 첫머리를 적고야 말았을 때... 삶의 모든 과정 앞에 어린 연인의 기억이 살아 숨쉬었을 것이다. 제삼자의 시선을 가지고 밀려드는 감정에 충실하며 나와 다른 사랑의 모양을 비상식적으로 여기지 않을 때, 이 영화의 가치가 더욱 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꼭 누군가에게 이입하여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면 윤희의 딸, 새봄이 되어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새봄은 이성의 연인과 보편적 사랑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가 엄마의 속마음을 듣고 어떤 반응을 취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직설적인 순수를 지닌 새봄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반드시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것을 믿는다. 분명 처음에는 엄마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다가, 결국 다른 누가 아닌 새봄 자신의 가치관으로 깨달을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던, 평범하고 소중한 감정의 한 형태일 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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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이름의 수신인


 

중심적으로 활용되는 소재인 윤희와 쥰의 편지에서도 함축은 드러난다. 여기서의 함축은 사전적 정의를 넘어, 터져나올 것 같아 애써 눌러쓴 글씨 속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싶다. 쥰은 ‘동경’이라는 단어 아래 모든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압축하고, 윤희는 자신에게 필요한 ‘용기’의 언급을 통해 변화를 기약한다. 서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넘치게 많지만 각자의 삶과 흘러간 시간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은 오랜 시간 마음을 닫고 스스로를 죄인으로 칭했던 윤희가 솔직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과연 윤희의 추신이 오타루까지 닿았을까? 또 한 번의 미공개와 열린 결말은 우리에게 결정적인 여운을 선사한다. 아마도 다수의 관객들의 머릿속에는 막이 오르는 순간까지 적지 않은 궁금증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문 속에서도 이 영화의 장르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스토리의 생략, 자극적인 장면의 부재, 많지 않은 대사 등 일반적인 멜로 쟝르와는 조금 다른 형태지만 결국 사랑의 메시지를 절절하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뛰어난 독창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이전보다 각광받고 있는 퀴어의 소재를 잘 녹여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려 한 시도 역시 낙관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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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감성이 주는 선명한 감동


 

하얗게 펼쳐진 설원이 주는 특유의 감성을 동경한다. 참신한 영상미와 연출도 물론 귀하지만, 창작의 갱신을 끝없이 요구하는 여론에서 고유한 색감으로 다시 도전하는 정신 자체가 의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의 촬영지로 다소 뻔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겨울의 일본에서 <윤희에게>만의 분위기를 정립하는 데 성공한 것은 단지 퀴어 영화라는 특징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눈밭의 배경 위에, 정적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두 여성의 서사가 적절하게 조화되어 특별한 보편성에 닿았다는 생각이 든다.

 

청춘의 새콤함을 나누고, 이별과 절망 끝에 충만의 순간을 추억할 수 있게 된 윤희와 쥰이 이제는 더 이상 사랑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세계에서든 마음으로 닿아 있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출발 가운데 또 다른 인연과의 만남과 상실이 반복되어도, 영원히 서로가 서로의 꿈을 꾸기를. 미련 대신 동경을 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사랑의 추신을 덧붙일 수 있기를.

 

<윤희에게>는 작품이 제시하는 여백에 우리의 감정을 쏟음으로써 완성된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를 <러브레터>의 유산이라 칭했지만, 무언가의 잔재가 아닌 하나의 고유한 작품으로 평가받기를 소망한다. 바다를 건너 전해지는 두 통의 편지가, 내가 감히 들여다볼 수 없는 두 사람만의 꿈이, 결국 하나의 결말을 맺는 사랑이, 겨울이 돌아올 때마다 내 기억 속 설원을 두드릴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나의 아름다운 겨울연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박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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