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정할 만큼 다정한 - 온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6.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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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말하는 방식으로 더 말하는 시. 안미옥의 시에는 삼켜진, 쟁여진, 그리하여 심연으로 내려가는 굴을 파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층 한층 탑을 쌓아올리는 그런 말, 들끓는 침묵의 언어가 함께한다."

 

안미옥의 시집 <온>에 대한 김행숙 시인의 평이다. 덜 말하는 방식이란 무엇일까. 침묵의 언어를 향해 느리지만 정직하게 걸어나가는 방식, 진정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진심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하는 방식, 쓰여져 있는 언어에서 쓰여지지 않은 언어를 발견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하여 온점 뒤에 감춰진 문장으로부터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간 마음들은 시 속 화자와 독자 모두의 손이 가닿을 수 없는 공간에 산재해 있다. 그러한 마음들이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하거나 구체화하는 일은 오히려 안미옥의 시 속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마음'이라는 단어와 점차 멀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문장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어느 순간 동치가 되어 나타나고 이 마음과 저 마음을 첨예한 눈빛으로 구분하는 일이 무색해진다. 온점을 찍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마음들은 밀물과 썰물이 동시에 생겨나듯이 한꺼번에 다가온다. 정말이지, 안미옥의 시집 <온>은 다정함과 비정함을 양손에 쥐고 다가온다.

 

 

너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에 마음이 간 적 없었다. 고요를 알기 위해선 나의 고요를 다 써버려야 한다고. 가두어둔 물. 멈춰있는 몸.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버티기 위해선 버틸 만한 곳이 필요했다. 눈동자가 흔들릴 때. 몸은 더 크게 흔들린다. 중심을 잡기 위해 비틀리는 몸짓. 거울이 나를 도와주진 않는다. 노크하기 직전의 마음을. 울 수 없는 마음을. 나는 불 꺼진 창을 본다.

 

- <불 꺼진 고백>

 

 

너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나의 그것과 일치시키지 않는 나는 정지된 것들을 응시한다. 가두어둔 물과 멈춰 있는 몸,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까지.

 

정지된 자신을 응시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섰을 때 멈춰 있는 한순간을 응망하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고요를 알기 위해 나의 모든 고요가 깨져야 할 때 눈동자가 흔들리고 거울 속의 나조차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불 꺼진 창 뒤 어딘가에 있을 너와 서로 기대어 조금이라도 이 흔들림을 멎게 하고 싶어 노크를 시도하는 마음이란 비정함 속의 다정함이다. 네가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걸렸던 시간과 그 모든 마음은 그만큼 다정하다.

 

그러나 네가 문을 열고 나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눈물을 보이지 않고 싶은 마음이란 다정함 속의 비정함이다. 버팀목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앞에서조차 울 수 없는 마음이란 그토록 비정하다.

 

<불 꺼진 고백>은 어떠한 역접 없이도 문장과 문장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 온점을 찍는 방식으로 그러한 상반되는 마음의 양상과 내밀한 감정의 모양을 제언한다. 그러나 정말 노크하기 직전의 마음과 울 수 없는 마음은 서로 대치되는 마음일까? 그전에 이 둘은 다른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서로가 나눠가진 마음이 다정함과 비정함이라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는 말이, 너의 그 말이 진짜라는 것을 우리는 여전히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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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는

무너지는 마음 안에 있었다

 

무너지는 것이 습관이 된 줄도 모르고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더 크게 무너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주저앉을 마음이 있다는 건

쌓아올린 마음도 있다는 것

새가 울면

또다른 새가 울었다

 

- <톱니> 부분

 

 

주저앉는 마음이란 쌓아올린 마음이라는 것. 네가 울면 나도 울게 되고, 네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진다는 것. 그 역도 언제나 성립한다는 것. 안미옥의 시에서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독자의 몫으로 남을 뿐, 간결함 속의 복잡함과 난해함 속의 단순함은 우선적으로 제시된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가장 비참한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과 함께 놓여있다고. 무너지는 마음이 쌓아올린 마음과 함께 있는 것처럼, 침묵과 발화를 함께 병치하는 것처럼, 온점 옆에 다른 온점이 놓여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온점 너머로 걸어가는 사람의 양손에 다정함과 비정함이 들려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다고. 함께 나아간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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