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기 파멸적인 나르시시즘 [영화]

글 입력 2024.06.1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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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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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찰스 더버(Charles Derber)는 그의 저서인 <관심의 추구>에서 '대화 나르시시즘'을 말한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이들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대화의 초점을 자기중심으로 이끌려는 욕망을 지닌다. 여기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에도 '대화 나르시시즘'의 전형인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시그네. 카페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으며 예술가 남자친구 토마스와 함께 살고 있다. 영화를 보면 이러한 대화 나르시시즘을 시그네의 행동을 통해 금방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대화 나르시시즘의 원인은 주로 남자친구 토마스다. 그녀는 개인 전시회를 열고 인터뷰한 잡지사의 표지모델까지 한 토머스가 지인들과의 대화나 비즈니스 대화의 중심이 되는 걸 원치 않아 한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으면 서슴지 않고 토마스를 면박 주거나 평가절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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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단체 식사 자리에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며 주의를 끌고, 토머스가 도통 그녀의 얘기를 한 적 없어 동생인 줄 알았다며 교묘하게 선을 긋는 대화 속에서 온전히 이해와 걱정을 한 몸에 받기 위해 다시 '환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모습들이 그러하다. 이때 관객을 흥미롭게 하는 지점은 시그네가 정말 그러한 것들을 겪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뮌하우젠 증후군(인위성 장애)'처럼 보이는 시그네는 과장에서 시작해 허구까지 이르는 거짓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러한 시그네가 타인의 주의를 끄는 소재는 '모두가 주저할 때 개에게 목을 물어뜯긴 여자를 구한 나'라는 '영웅담'에서 시작해 점점 '동정심'이라는 자기 파멸적인 것으로 치닫고 만다. 목줄이 묶여있는 대형견 앞에서 자신을 물고 싶냐며 목을 들이밀고, 인상 쓰고, 개의 얼굴을 밀치는 모습을 보이는 시그네. 이뿐만이 아니다. 시그네가 '관심'을 얻기 위한 하는 기이한 행동들은 결국 불법 약물 오남용까지 닿게 된다. 시그네는 그 약을 통해 피부병을 앓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어느 날 원하던 피부병을 얻은 시그네는 마치 '전시'하듯 팔을 들어보이며 팔에 난 피부병을 타인에게 내보인다. 이른바 '불행전시'라는 말이 생겨난 현 사회가 떠오르는 장면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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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네는 '동정심'으로 환심을 사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한 동정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든 자기 우월을 즐기기 위한 마음이든 상관없을 만큼 시그네는 그러한 관심과 걱정에 쾌락과 안도, 우월을 느낀다. 결국 이 위험한 욕망이 시그네의 얼굴을 붉고 곪은 모습으로 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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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나르시시즘은 타인과 지독히 얽혀있음을 드러낸다. 그러한 것은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나지만, 그중 '시선'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연출한 후반부 광고 촬영 장면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시그네는 병이 있는 이들을 위주로 한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해 모델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시그네는 'regardless(상관없이)'라는 광고를 찍게 되는데, 이때의 광고 촬영장이 흥미롭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촬영장은 박물관 혹은 전시장의 느낌을 준다. 시그네는 수많은 조각상을 배경 삼아 광고를 찍기에 그녀는 조각상 한가운데에서 홀로 서 있다.


영화는 중간중간 집착적으로 조각상을 비춘다. 이는 마치 조각상이 시그네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또 시그네를 하나의 조각상이자 전시품처럼 느껴지도록 하고 있다. 즉 관람의 주체가 사람이 아닌 조각상이 되는 주객전도의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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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네는 토마스를 통해 자신의 인터뷰 내용에 관한 감상을 듣고 싶어 했다. 감상을 듣던 시드네는 토마스에게 "내가 자랑스러워?"라고 물었다. 어쩌면 시그네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정이었을지도 모른다. 'regardless'라면서 타인의 고통을 전시해 이익을 취하는 표면적인 인정이 아닌, 주변인에게 받는 '네가 자랑스러워', '너의 용기는 대단해'와 같은 말 한마디 말이다. 왜냐하면 (시그네의 환각이었을지라도) 토마스에게서 위의 말을 들은 시그네는 감격스러운 눈물과 함께 아주 사랑스러운 웃음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반한 나머지 물에 빠져 죽는다. 그렇다면 시그네가 반한 것은 무엇일까. 자기 자신? 화려한 삶? 관심? 무엇이 되었든 엔딩 크레딧 속 시그네만큼의 해방감은 얻지 못했을 테다. 집단 상담을 진행한 이들과 함께 녹색 숲을 거니는 시그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천진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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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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