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 주로 여행을 가는 편입니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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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살 4학년, 졸업 영화를 준비하는 어느 날이었다.
졸업을 하기 위해 달려야 하는 마지막 하이라이트, 작품의 계주.
좋은 결과를 받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로 앞만 보며 온 힘을 다해 뛴다.
하루가 다르게 시간은, 결과도 모르는 미래 앞으로 나를 쫓아가게 만든다.
습관처럼 버릇처럼 태생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현재 인생의 한 번뿐인 삶 자체를 즐기며 살기보다, 많은 고민과 현실에 늘 대비하며 살아간다. 더 좁아질 취업의 문턱에 나아지지 않는 경제의 문제에, 줄어드는 탄생과 늘어나는 죽음들에, 사랑하지 못하는 현실과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 따라잡아야 하는 모든 순간들이 가끔은 너무 버겁다고 느껴지기도 하지 않는가.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이 있다. 그래서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통해 채우려고 하는 갈망을 가진다. 살다 보면 숨 가쁘게 시간이 지나가다 보면, 갈증이 난다. 나는 늘 입 버릇처럼,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내가 갈망하고 갈증 하는 결핍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럴 때마다 작은 시간들을 모아 여행을 떠난다. 이게 내 결핍을 채우는 방법이다.
그래서 전주로 떠났다.
날씨의 요정
날씨의 요정이 되고 싶었다. 내가 가는 길은 늘 맑고 밝길 바랐는데, 항상 여행을 갈 때마다 비가 온다. 날씨를 이주 전부터 봤는데 하필 여행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떠있었다. 내 눈에 가장 담고 싶었던 건, 하늘에 맑게 떠 있는 구름의 색과 연한 파란빛, 초록의 나무들의 조화였는데 회색 먹구름이라니.
그러나 전주에 도착했을 때의 날씨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먹구름은 따가운 햇살을 가려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었고, 먹구름은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지나갔다. 카메라에 풍경을 담았을 때도 역광과 함께 흐리게 담긴 풀 밭의 사진이 오히려 깊은 감정을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 날, 말도 안 될 정도로 맑았다. 햇살은 풀과 한옥에 닿아 따뜻한 빛을 냈고, 그토록 눈에 담고 싶었던 하늘과 나무를 봤다. 건물이 없는 탁 트인 잔디밭을 보며, 나만의 지평선을 그릴 수 있었다. 바람에 사락 거리는 얇은 대나무 잎 소리와 얼굴에 내려앉는 햇살과 뭉게구름은 나를 날씨의 요정으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역시 행운은 마음가짐에 달렸어!
흘러가는 법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의 유연함은 배우고 싶어도 하루아침에 배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주어진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안되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다른 목표를 찾아 다시 하는 사람. 여유 있어 보인다. 언제든 다시 일어날 것 같다. 그들은 감탄할 정도로 긍정적일 때가 있다. 그런 맑은 마음이, 모나지 않은 긍정의 힘이 그들을 여유롭게 만드는 걸까?
가끔 스스로 너무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누구든 따라잡기 위해 더 배우는 것에 목표를 두고, 더 많은 여유를 위해 열심히 돈을 벌지만 다른 여유가 없는 느낌. 미래에 대한 불완전함을 대비하고 싶어 늘 고민하고,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 상황에 따라 내가 다르게 보이겠지만, 나는 지금 나는 긴장되어 딱딱해진 삶을 말랑하게 해줄 유연함이 필요하다.
전주의 한 벤치에서. 따뜻한 위로가 되는 햇살을 받으며 멍을 때리고 있었던 오후 3시. 한옥 뒤로 자유롭게 흘러가며 모양을 바꾸는 뭉게구름들을 보며 생각한 어느 흐름들.
여행자의 행운
전주의 모든 것이 새로웠다. 처음 보는 사람, 새로운 맛, 처음 보는 풍경들. 하늘은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지만 땅은 일상에서도 볼 수 있다. 꽃과 풀, 다양한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고양이들이 잔뜩 지나다니는 풍성한 땅. 봄의 끝자락, 초여름의 5월이 좋다.
여행자에겐 늘 행운이 따른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마법 같아서 어떤 상황이든 긍정의 힘으로 바꿔준다. 여행이라 예상치 못한 비를 잔뜩 맞아도 특별한 경험이 되는 것 같아 좋고, 기대했던 음식이 기대에 못 미쳐도 또 다른 맛을 찾아 떠나면 되는 거니까. 다시 끔 찾아 나설 수 있다. 새로운 상황과 기분에 놓여 마음껏 웃을 수 있어 좋다. 작은 행복조차도 큰 행운과 행복으로 다가오는 게 여행이다.
숙소에서 아끼는 목걸이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사장님께서는 내 목걸이를 찾아 아주 귀여운 주머니에 넣어 돌려주셨다. 길거리에는 행복한 세잎 클로버들이 길을 만들어 놓았다. 어디 갈지 고민하다 들어간 책방에선 보지 못했던 독립 서적들이 많았고 그중 아주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책 구경을 하다가 좋은 문장까지 선물 받았다.
<다정한 명주바람 색>이라는 책에서 바람은 어떻게 지치지 않고 멀리 가냐는 물음에 바람은 지치지 않는 게 아닌, 지치기 전에 잠깐 멈춰서 숨을 돌린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이 참 와닿았다. 나도 그래서 떠나왔기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필자의 상황이 초조한 나와 비슷해 보여서, 나는 책에서 친구를 만난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참 좋은 행운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책을 고르다, 재미난 책을 사서 나왔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는 나눔 책이 있었다. 지역 여행 책이었는데, 대가 없이 책을 나눠주다니 참 좋은 서점이다. 우연의 연속에서 행운을 발견하는 일도 재밌다. 한옥 엽서가 눈에 띄어 들어간 작은 가게에서는 햇빛에 비추면 반짝이며 빛 스며드는 팔찌를 발견해 선물 받았고, 잘 먹지 않지만 이끌림에 시킨 커피는 정말 맛있었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난 웃긴 상황들은 전주에서의 기억을 잊지 못하도록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여행자의 행운은 그랬다.
여행의 끝자락, 한적한 평상에 누워있었다. 얇은 나뭇잎들이 소리 내어 사락거리고,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두 뺨을 지나가고 나는 햇살을 가득 받아들였다. 누우면 땅보다 하늘이 더 잘 보여서 가끔은 누워서 다니고 싶다. 누워서 보는 높은 하늘은 내 부담감을 덜어준다.
하늘에서 보는 나는 그저 작은 한 사람일 것 같아서, 이리 큰 세상에서 스스로 그리 무거운 부담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은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 삶은 계주가 아니라 마라톤이었다. 앞만 보고 질주하는 것이 아닌, 주변도 둘러보고 스스로 호흡을 조절해가며 비로소 완주하는 마라톤. 풍부하고 풍성한 삶을 만들고 싶어졌다.
- 2024년 5월 30일 : 다시 좋아하는 초여름의 전주에서 씀 -
[황수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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