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마주 대하거나 헤어질 때에 예를 표함. 또는 그런 말이나 행동.
생각해 보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반드시 인사를 건네야 했을 사람에게 건네지 못했던 인사가 많다. 아마도 만남보다는 헤어짐의 순간에 나누는 인사가 서로에게 더욱 소중한 의미로 남겠지만 내게는 시작도 끝맺음도 모두 어렵고 벅차다.
그래서 마주 대하거나 헤어질 때에 예를 표한다는 인사의 사전적 의미가 참 좋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는 그 사람과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질 때 분명 다른 의미로 전환된다.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충족되거나 진심과 동떨어진 언어들 속에서 일종의 결핍이 발견되기도 한다. 의미의 전환이 어느 쪽으로 이루어지더라도, 관계가 지속될수록 인사는 하나의 관성이 되어간다.
그러한 관성에 젖어있던 탓에, 내가 관성에 젖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탓에, 어느 날 문득 매일같이 마주했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시감을 발견했던 때조차도 내가 소유한 인사의 관성을 망각한 탓에 그 사람들이 나를 떠난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은 순간이 있다.
어째서 내게 마지막 순간에 그토록 모질어야 했던 것일까. 어째서 나는 내가 몰입했던 관계가 이어져온 세월에 마땅한 예를 받지 못했다고 느낄까. 내게서 '헤어질 때의 예'를 표할 기회마저 앗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헤어져야 한단 걸 알아요
그날이 온 것을 알아요
아주 조용히 일어날게요
새들이 놀라지 않게요
준비할 수 없단 거 알아요
그대는 울고 싶어져요 그래요
하지만 마음 깊이 알아요
슬픈 눈물이 아녜요
겸손한 그대여
어딜 가든 사랑받기를 바래요
부드러운 바람이 부네요
어서 가세요
먼저 가세요
(...)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인사도 없이 떠나간 사람들을 더는 원망하지 않게 된 시점이 언제일까. 이 노래를 처음 접했던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스물한 살 언저리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의 감정과 생각을 술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의 내부와 외부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체념인지 방관인지, 아니면 정말 극복을 한 것인지 스스로도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하나 확실했던 것은 그들을 더 이상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온전하게 떠나보냈다는 것.
한편 홍찬미의 <인사>가 반드시 헤어짐의 순간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될 때 나는 이 노래를 습관처럼 찾아 듣고는 했다. 특히 입대를 위해 부모님과 함께 훈련소로 갔던 날 아침에 차 안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떠나보내기만 했던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떠나보내주었던 시간.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와 하는 이별.
이 노래가 이처럼 오랫동안 나에게 머물러있던 이유는 그래서였을 것이다. 만남과 이별을 동시에 들을 수 있기에. 그리고 그러한 기억들을 멜로디와 가사 뒤편에 남몰래 묻어놓을 수 있기에.
내가 하지 못했던 인사들이 켜켜이 쌓여 어느새 야트막한 무덤이 된 듯하다. 차마 건네지 못한 채 흘려보냈던 인사말들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지만 그럼에도 예전과 달리 후회의 형태로 남아있지는 않다. 그래서 언제든 쉽게 찾아갈 수 있으나 돌아 나오는 길은 생각보다 멀다.
내가 앞으로 나누게 될 인사는 얼마나 먼 곳에서 이루어질까. 그 순간을 다시는 놓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먼 길을 걸어가야 할까.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과거의 공백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진다.
언젠가 다른 누군가와 헤어짐을 겪게 되는 날, 인사라는 한 마디에 갇힌 수많은 상념들에 솔직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끝내 고백함으로써 조금의 후회도 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이 노래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