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마지막 응원

다른 방식으로 보는 기억의 유대감
글 입력 2024.02.1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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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도 무대도 다르지만 『밝은 밤』, 『완벽한 생애』 두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너의 잘못이 아니야!" 『완벽한 생애』의 '윤주'가 '시징'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말엔, 『밝은 밤』의 할머니 '영옥'이 손녀 '지연'에게 편지를 읽어 달라며 부탁했던 일엔 이 말이 숨겨져 있다고요. 필자인 저도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2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떠나고 방황하며 인물들이 속내를 털어놓는 그 속에서 분명 보았어요. 두 소설은 가장 어둡던 시절 빛처럼 다가와 밝은 밤을 선물해 줬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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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장편소설 『밝은 밤』은 화자 지연이 이혼 후, 희령에서 영옥과 재회하며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조해진의 장편소설 『완벽한 생애』는 윤주, 시징, 미정 세 화자가 마음의 부채를 털어내고 새로운 삶을 개척해 가는 이야기고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삶의 기둥이 통째로 뽑혀버리고 나서야 압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냉정한 사람이란 걸. 기둥 자리엔 커다란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것을 어둠 속으로 삼켰죠.

 

돌이켜 보면 지연, 윤주, 시징, 미정 네 인물은 '생애의 일부'를 공유하면서도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것 같습니다. 최진영 작가도 발문에서 '이 생애가 너무하다 싶을 때, 밀어닥칠 때, 힘겨운 마디를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떄, 이대로는 계속 살아갈 수 없을 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떠난다(p. 163, 『완벽한 생애』 中)'고 말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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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면 이들에게서 저를 겹쳐본 건 우연이 아녔던 것 같아요. 생활은 지긋지긋했고, 다시 시작할 용기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남아있는 곳에서 마주칠 사람들이 두려워, 기억을 그대로 지닌 채 저와 시징은 영등포에, 윤주와 미정은 제주도에, 지연은 희령으로 떠났으니까요. '집에서 훼손되는 시간이 마땅한 결과라는 듯, 현재를 절박하게 방치하는 것이 보속이라도 된다는 듯(p. 87, 완벽한 생애』 中)' 생애를 비참하게 재구성하면서요.

 

어쩌면 우리는 나란 존재를 크게 생각해서 모든 감정의 빗물을 받아내다 넘쳐버린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뽑힌 기둥 자리에 생긴 공허함을 무엇으로든 메워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요.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p. 336~337, 『밝은 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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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도 '삼천'이처럼 해사한 웃음을 가진 증조할머니가, '영옥'처럼 손녀를 지극히 아끼던 할머니가 계셨고, '미선'처럼 애증 관계인 부모가 옆에 있습니다. 소설 속 죽음은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하던 중환자실로 저를 데려갔어요. 나보다 컸던 사람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쪼그라진 풍선처럼 납작하게 침대에 파묻혀 있었죠. 마지막인 줄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단 절망감은 '지연'의 심정으로 닮아 있었습니다. 그 뒤로 '명숙' 할머니와 헤어지던 어린 영옥이, 새비의 임종을 앞두고 곁을 지키던 삼천과 영옥, 희자의 얼굴이 연이어 나타났죠.

 

영옥은 고이 간직한 편지뭉치를 지연에게 쥐여줍니다. 삼천과 새비, 영옥과 희자가 서로를 북돋우며 잘 살아내겠다는 다짐이 지연의 입에서 되살아날 때마다 따뜻하고 찬란해서 몸에 온기가 돌았어요. 모진 인생이었지만 모나지 않은 여자들의 삶은 다음 세대에게 찾아온 붕괴 흔적이 잘 수습될 수 있게 용기를 주었죠.

 

윤주, 시징, 미정의 허망함도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형편없던 삶에 생의 의지가 움트며 돌아갈 때란 걸 알려주죠. 그렇게 먼저 돌아간 이가 용기를 내어 회복된 일상을 전하고, 전달받은 이도 용기를 내며 생애의 한복판으로 성큼 걸어 나가죠. 필자도 주인공들도 다를 바 없었어요. 영등포 구석구석을 누비며, 옛 연인의 흔적을 쫓는 시징, 제주의 천막촌에서 신념의 끄나풀을 잡은 미정, 부당한 인사 개편에 항의하지 못하고 도망친 윤주는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었고, 평범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미완의 생애를 출발과 도착이 공존하는 장소에 가둔 것뿐이었으니까요.

 

희령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지연은 '기억이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어요. 남편의 바람과 그의 잘못을 감싸면서도 딸의 아픔은 살펴주지 않는 엄마 미선은 분명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영옥이 들려준 이야기는 오래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 되었어요. 100년에 걸친 역사는 '엄마와 할머니', '지연과 엄마 미선'의 거리감을 내보일 수 있는 마음이라 부르게 만듭니다. 영옥은 지연에게 어머니 '삼천'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해요 "우린 그렇게 다시 만났던 거라고." 호기심 많은 삼천이 환생한 듯이 꼭 닮은 지연과 그런 손녀를 어루만지는 할머니는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나겠다'는 고조모의 유언과 겹치며 이들의 만남이 우연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순한 위로입니다. 윤주가 시징에게 차마 적지 못한 말 "괜찮아, 너의 잘못이 아니야!" 이 한마디가 우리가 듣고 싶었지만, 아무에게도 듣지 못한 생애의 응원이라 여겨요. 이제 지연은 자신과 언니, 할머니와 증조모가 손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을 액자에 넣으며 마음을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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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마지막 낱장을 넘기며, 어느새 활력을 찾은 저를 발견했어요. 돌아오며 결심한 게 있다면, 나 이외의 사람 또는 상황 때문에 도망치지 말잔 것입니다. 그 결심을 떠올리며 윤주가 시징에게 보낸 편지에 진한 밑줄을 그었어요.

 

물론 필연적인 과정들을 통해 생애가 완벽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완벽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p. 151, 『완벽한 생애』 中)

 

우리는 편지에 적힌 사랑 기록을 평생 기억할 것입니다. 세대와 국가를 뛰어넘은 유대감이 흐릿한 기억 속에서 계속 재생될 테니까요. 우린 "우연히 불시착한 곳에 그런 상황이 펼쳐졌을 뿐이라고. 우린 다시 이 행성을 떠날 여행자라고요."

 

 

[오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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