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체육선생 고제하에 대하여

글 입력 2024.01.1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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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었다. 엉켜있는 수 많은 낱말들을 머릿속에서 곱씹다가 눈을 감았다. 오늘도 결국 제대로 글을 읽지 못했다. 뇌에 녹아내리지 못한 글자 획들은 제하의 호흡기관 안에서 배회했다. 먹먹해지는 목울대를 따라 곧 눈시울이 붉어졌고, 제하는 부르튼 입술을 깨물었다. 제하의 뇌가 문자를 거부한지 벌써 석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의사는 이것이 그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설움이 축적되어 온 결과라고 말했다. 조곤조곤 설명하는 의사의 입술만을 바라보며 그래요… 힘 없이 대답한 제하는 그 이후로 병원에 찾아가지 않았다.


병원에서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며 제하는 불행이라는 낱말을 곱씹었다. 불행의 정의를 생각했다. 정류장에 다다를 때 쯤 제하는 문득 병원에서 엉터리라고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며 욕 하고 싶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리고 본인에게 그런 성정이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제하 ; [명사] 1. 행복하지 아니함. 2. 행복하지 아니한 일. 또는 그런 운수.

 

 

뼈가 긁히는 가난의 연속이었다. 굶주리는 배를 수 십 번 머릿 속에서 발로 찼다. 아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죽기 싫다는 생각의 공존은 어느 새 제하를 머릿속에서 자신에게 수십번 토악질을 하는 인간으로 키웠다. 제하의 자학에는 인간의 몸뚱이를 향한 원망과 울분이 가득 차 있었다. 서글픔이 자신의 발에서 아지랑이 일렁이는 아스팔트 안으로 뿌리를 내렸다.


부모는 없다. 형제도 없다. 친척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그날 담임 선생이 했던 말은 고제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고제하에게는 명백히도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였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세 가지는 가난과 외로움과 질병이라고 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어린 제하는 이불에 누워 선생님의 말을 곱씹었다. 본인은 나이 열에 그 세 가지를 모두 만족 시킨 인물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그렇다면 나의 삶은 앞으로 평생 가장 무섭고 고통스럽겠구나. 자신의 불행이 타자로 인해 명확해진다는 것은 묘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유리창으로 비춰 들어오는 달빛과 섞여 제하의 귓가에서 기묘한 울음소리로 들어왔다. 제하가 그것이 본인의 입에서 나는 소리임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린 제하의 사정을 안 옆 집 여성은 제하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며 제하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여성의 딸이 일 년에 두어번씩 한꺼번에 버리는 문제집은 대부분 앞의 다섯장 전후가 지나면 깨끗했다. 여성은 제하에게 그것들을 가져다 주며 공부를 강조했다.


가난한 제하는 절박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녔다. 눈에 띄는 것을 읽었으며 눈에 띄는 것에 연필 흑심을 묻혔다. 자주 달리고 자주 집 근처에 있는 입장료 2000원의 공공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쇼핑과 먹을 것에 대해 무지한 제하는 그런 그저 자신에게 허락된 것들을 했다.


그때부터 삐쩍 말라있던 팔과 다리에 조금이나마 근육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자주 다른 아이들이 제하의 달리기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수영을 하고 나올 때 쯤 나무색 머리카락에서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제하는 어째서 이따금씩 자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가에 대한 이상한 의구심을 띄웠으나 그는 지적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표독스러운 따짐에 더 가까웠다. 어쨌든 이러한 종합적인 행동의 결과는 제하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과적으로 제하는 4년 전액 장학금 전형으로 수도권 국립대에 속한 체육 사범대를 갔고 임용고시에 순탄히 붙었으며 1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제하는 아이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썩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의 선도부는 체육선생의 주도로 흘러가기에 제하 또한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아이들은 제하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흔하지 않은 젊은 여선생의 담담한 꾸지람을 대부분의 아이들은 호쾌하게 들었다. 이는 분명 제하가 비록 체육을 업으로 삼을지언정 천성은 유약하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사실 덕분에 일부의 아이들은 제하를 만만하게 보았다. 어느날 그들이 그녀에게 비속어와 반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교내 여자화장실에서 당당히 흡연을 하던 그들을 발견한 것이 시초였다. 제하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대처했으나 그것이 그들의 심기를 더욱 거스른 모양이었다. 결국 그들이 본인에게 손찌검도 했다는 사실을 제하가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볼이 붉게 부어오른 후였다.


화장실 주변은 시끌벅적해졌고, 지나가던 남선생의 도움으로 제하는 금방 그들과 분리되었으나 그날 제하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수 없이 선생이라는 직업에 대해 고민했다. 자신의 잘못과 아이들의 잘못, 그리고 이유 없이 갑자기 비집고 나오는 가난에 대한 증오가 하나에 뒤섞여 제하를 잠식했다.


다음날 그 남선생과 교제 중이라는 소문이 학교를 뒤덮자 제하는 적당히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출처의 근원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악의적인 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남성은 제하보다 열다섯이나 더 많았고, 가정이 있었다.


하지만 제하는 아이들을 떠나기 싫었다. 수업 시간 아이들의 바른 이마 위로 노을 빛이 내려앉는 것이 좋았다. 솜털이 남아있는 살갗에 땀이 송글송글 맺어있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낸 것만 같았고, 아이들이 타인에게 말하기 어려워하는 고민을 제하에게는 쉽게 털어놓을 때이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제하는 자신도 모르게 삶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제하는 끝까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믿고 싶었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싶었으며, 학교라는 곳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올리고 싶었다. 그렇기에 제하가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제하의 육신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반 년 뒤 제하는 까막눈을 안고 아이들을 떠났다.


교문을 나오는 길에 제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제하는 오랜만에 수영장으로 가 그 눈물을 숨겼다. 어쩌면 불행의 유의어가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김푸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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