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碍 14

사랑 편 마지막 장
글 입력 2024.01.0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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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거친 생각과 나약한 심장이 저항하고 부정하고 밀어낸들, 언젠가 끝내 항거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것은 운명에 대함이요, 그것은 내가 믿음이 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허무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너머 나의 희망과 믿음 또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과연 그 순간순간 소기 과정들을 나는 담아낼 수 있는가. 그리하여,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대들에게도 비슷한 것들을 드밀어 넣어볼 수 있는가. 

 

나의 사람들, 웬만한 친절과 상냥함은 냉소로 뒤바뀌어버리는 그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 불신자들아, 나는 그대에게 진정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쥐여 보일 수 있을까. 믿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것들을, 울력하듯이 다짐하듯이 강요하듯이, 벅차오르게 떠다밀 수 있을까. 나의 과격한 사랑을.

 

- 무애 無碍 13

 


이렇듯 세상에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어, 이름 한 자 모름에도 지닌 바 사랑스러움을 곧잘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이가. 그대도 떠올릴 수 있겠지? 두려운 집 밖을 나서는 때로부터, 우리는 무수히 많은 얼굴들을 스쳐 지난다. 아마 영영 그 이름 한 자 알아낼 수 없을, 그러나 얼굴로써 무수히 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란...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아, 이 인간의 세계에는 어디에나 그들로 가득하고 거기 두려움과 기쁨이,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과 추함이, 상처와 구원이, 가시와 표독과 경애가 있어, 즉 이 모든 것, 사랑으로 울고 웃는 사람들이 있고 그보다 멀리 배경으로는 이미 사랑이 가득 차 있지. 사랑하는 본능이, 사랑을 갈구하는 본능이! 거리에는 사랑이 넘치고 사랑에 울고 웃는 모든 이 광경들보다 먼저 그리고 이미, 오직 사랑하는 본능으로 가득 차 있다.

 

선뜻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 "거리에 사랑이 넘친다니,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그대는 단 한 번도 서울의 거리를 거닐어본 적이 없는 것이구나. 거리는 차갑기 그지없다, 그대는 추위에 떠는 걸인을 보지 못했느냐, 계단 앞에 망연한 맹인과 매번 승강장으로 돌진하는 그 무수한 휠체어들을? 그대는 겨울이면 외투 깊숙이 자신을 파묻고 홀로 거니는 자를 보지 못했더냐, 소리 죽여 전율하는 모든 자들을? 아, 보지 못했겠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거리를 거닐 때마다 나는 전율한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나, 모두 나를 인식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나를 스치듯 지나가는 무색한 눈동자들을 안다. 내 영혼에 깊숙이 박힌 두려움들을. 사랑할 만한 무엇도 찾아내지 못한 눈동자 안에 얼마나 거대한 공허와 그에 비롯되는 공포가 깃들어있는지 아는가? 겨울 바다에 말려버린 동태의 눈깔처럼, 자신과 아무런 상관 없이 죽어버린 무언가를 바라보는 사람의 무심함처럼, 보되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 공허한 눈동자를? 무언으로 거절하는 그 눈동자를? 나는 한 마디 대화도 없이, 무수히 거절되어 온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매료되는 거야,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 이름 한 자 모름에도, 사랑스러움을 포착하자마자 열리는 동공, 이끌리듯 따라 도는 누군가의 고개를 나는 멀찍이서 본다. 한편 그 매료된 사람의 발은 자신의 갈 길을 따라 걸으며 목고개의 반대편을 향하여 우직하게 걸어간다, 개인의 내밀한 의식과 본능은 거기서 명확하게 표상된다. 뒤를 바라보며 앞을 향하여 걷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아, 이쪽으로 다가오는군, 나는 눈을 먼저 돌려두어야 해. 내가 줄곧 그대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켜선 아니 되지. 미리 피해둔 눈길, 나는 마치 그대를 처음 보는 듯이, 우연한 포즈를 가장하여 그대의 눈동자를 곁눈으로 바라본다. 소름 끼치도록 무관심한 눈동자, 차라리 강가의 조약돌을 바라보더라도 저렇게 하지는 않겠군. 아무런 생각도 자아내지 않는 거리와 횡단보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보다도 좁아지는 그대의 홍채와 동공을 나는 바로 인식해버린다. 나는 너무 예민한 탓에, 이러한 작은 힌트들에 너무 섬세하게 소스라치는 탓에 그것을 알지.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그 눈동자에 떠오른 공허는 말없이 인식 없이 의지 없이 의도 없이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버린다. 그대로서는 아니라고 말할 것들을. 그렇겠지. 그대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오히려 자신을 곡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를 더욱 못난 사람들로, 어딘가 비뚤어져 세상만사를 곡해하는 천치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르지, 가슴에 화가 많은 사람은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너무 많은 것을 밝혀버린다. 그것은 우리가 그대에게, 완전한 지루함과 무가치함으로 비치었다는 사실을 표상한다. 거울처럼 그저 드러내 버리는 것이지.

 

그 눈동자 하나하나가 거울이 되어 나는, 나의 인식은 잔인할 정도로 내게 되새긴다. 나의 초라함과 비루함을. 어떤 관심도, 그것이 정다운 것조차 아닐지라도, 한 줄기의 미약한 호기심마저도 나는 이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강가의 조약돌을 바라보더라도 저렇게 하지는 않겠지. 오 제발, 이런 생각을 그만두란 말은 말아, 이게 다 나 혼자 지어낸 과장됨이란 말은 제발 말아, 나를 분노하게 할 셈이냐,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지어내는 게 아니야, 나는 고통스러워, 이 모든 게 그저 뚝 하고 그쳐질 값이라면 세상에는 우울 같은 빌어 처먹을 것은 없었을 거야. 그런 나는 두려워하였으니, 기어들고 숨어버린 우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눈길을 끌 무엇이 있었겠어, 아, 오히려 검고 불길한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우리야말로 사람의 눈길을 확실하게 잡아챌런가.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잊히거나, 곁에 선 사람에게 어딘가 불길한 사람을 보았노라는 가벼운 우스갯소리와 함께 곧 잊히겠지. 그대의 귀하신 기억의 곳간, 그 귀퉁 일부분이라도 내가 차지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할 누군가를 한쪽 팔에 끼고서 웃음을 흘리고 있고, 그 가변으로 내가 지나갈 때면 무관심하게 툭하고 치어다보거나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지. 거리에 사랑이 가득하다라, 그래 어쩌면 그대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우리는 이 거리에 가득 찬 사랑이 버거워 스스로 방 안에 가뒀으니. 금요일 밤의 강남을 조감 鳥瞰 하는 상상, 거기에 우리가 있을 자리는 없다. 거리 위 야전상의에 고개를 묻고, 불안에 떨면서도 그 불안을 감추려는 유약한 심경은 표독한 가시를 눈에 드리운다. 그런 나약하고 포악한 우리, 전율하는 우리가 좋이 걸어볼 길은 없다. 거리에 사랑이 가득하다고 말 하지 마. 그런 그대는 그늘과 그림자를 모르는 사람이다. 초라함을 모르는 사람이다. 세상에 좋은 것이 많이 있다고, 그것을 보고자 하면 보일 것이고 갖고자 하면 가질 것이라고 말하지 마, 그 말로 하여 그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낮고 긍휼한 세상, 빌어먹을 정도로 무가치하고 무관심스런 것들의 세상, 그대가 서 있는 곳 바로 옆에 언제나 있었으나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세상을 그런 식으로 축소하고 지우지 마. 우리는 여기에, 인식되지 않은 채로 언제나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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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 속에 자리한 나의 그대들은 이렇게 이죽거린다. 그러나 사람아, 나는 그런 세상을 알지. 내가 어떻게 그런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겠느냐, 내가 그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고서는. 알고서 뱉는 말이라는 점을 감안해주. 나는 그대이다, 그러나 그대도 나일까. 좀 더 지켜보라고. 우리는 그 늪과 같은 곳으로부터 빠져나오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희망하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몸소 누리고 있다. 나의 독하고 과격한 사랑은, 그것의 어려움에 대한 가장 냉철한 이해에 기반한다. 이건 사랑의 시 詩야, 염세주의자의 사랑, 불신자의 인류애, 온통 역설로 짜 올리는 사랑 노래. 그러니 이것은 쉬이 그대 가슴에 안착하진 못할 것이야. 그러니 한편 이 글을 접하게 된 상냥한 자들아, 그대들의 반감과 당혹스러움은 당연함이야. 나의 사랑은 역설, 그 당연한 모습들의 이면에서 출발함이니. 허나, 이건 그대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대들을 위한 이야기는 나의 것이 아니라도 세상에 이미 많다.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수천 가지의 방법과 모습들이, 이미 세상을 차고 넘치게 흐르고 있다.

 

세계에 대해 내가 뱉고 있는 독한 사상과 어쩜 한쪽으로 과편향되게 치우친 것으로 여겨질 표독과 네거티브, 그에 대한 사람의, 오 사랑스러운 그대들의 반감과 거절하는 심경. 이 말이 끝내 다 닿기도 전에, 한눈에 생겨나는 오해들과 그것보다 훨씬 빨리, 그대의 기억과 결부하여 만들어내는 선입견들을 알지. 알지, 그것은 내 몸의 곳곳에 새겨져 있으니. 그대, 아무리 부정하여도 사람으로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 믿음과 상 狀의 연역이 내 영혼의 척수에 패여 있음이니. 허나 내가 겪고 보아온 세상은 한없이 차가운 대지이다. 방 안에는 가득 찬 겨울바람, 그 가운데서 피어나는 내 모든 언어는 표독하고 교만하지. 혹 나를 궁금해할 사람아,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대가 하필 나를 그저 사랑하는, 지독히 사랑하는 경우의 수를 제외하고서는, 심지어 그 지독한 사랑에도 불구 나는 즉물적으로 이해되지 아니한 동물이었으며, 그대가 오래 들여다보아 나를 이해해줄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음이니. 나는 이제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 아무런 반감도 없을, 표백한 시선과 기억으로.

 

여하간 이런 것을 마음껏 주워 삼기는, 그리하여 이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생산하는 내게 기울어질 몰이해와 무관심, 나아가서는 경멸까지도 나는 이해해. 이건 그리 사랑스럽지 않거든. 허나, 이건 사랑스런 그대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 글은 명랑한 그대들을 향하지 않아. 그럼에도 나의 사상이 그대의 사상에 정면으로 위배되고 충돌하며 의도와 상관없이 그대의 것을 부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 가슴 안에 들어있는 그것을. 다정함과 사랑스러움의 이론, 뭇 사람에게 행하여도 아무런 위험이 없고, 또 뭇 사람들의 믿음으로 하여 강대해진 그 이론을. 허나, 그건 내 의지가 아니야. 다만 언어 양식의 한계이자, 인간 사고의 한계이자, 인간의 나약함일 뿐. 그것까지 다 안고 에둘러 갈 수 없다. 그래선 해야 할 말을 할 수 없어, 그건 내 능력 바깥. 나는 나로부터 먼저 완결되지 않은, 이 어지러운 것들을 정렬하고 바로잡아 세우리. 그리하여 내가 그 안에 살고, 누군가 닮은 사람만이 여기에 머물기를.

 

다만 그런 그대 가슴에도 내 새겨질 의미나 가치가 있다면, 그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대가 어림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과 그 끝에 이런 어지러운 사랑은 탄생하여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 정도. 나는 낮고 차가운 세상과 그 닮은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알리어 이해시키고 싶지는 않아, 그건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라 차라리 다른 식으로 행해야 옳은 것이요, 애초 그대가 이해할 당위가 없는 것이니. 하지만 저항하는 그대가 잠시, 나에 상충되는 자신의 사상과 그에 대한 믿음을 가변으로 밀어두고, 혹 묶어놓고, 혹 기다리는 심경으로 잠자코 이 글을 굽어보아줄 수 있을 만큼 지혜롭다면, 마침내 그대는 우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채 이해치 못하는 자, 그리하여 불신으로 흔들리는 자 그에 무엇 좋음과 이로움이 있느냐고 또 미심함으로 물으신다면, 그건 그대에게 달렸다고 하여야겠지. 자기 자신을 드높이고자 하는 사람, 그리하여 더욱 커다라이 이해할 줄을 아는 지혜를 바라는 자, 그리하여 모든 것을 품어볼 가슴의 고귀함을 스스로 바라는 자에게라면, 이것이 한 가지 이야기쯤 되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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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 그리하여 나의 모든 말이 올곧이 향하고 있는 사람들은 초라한 사람이다. 그저 막연한 초라함보다 훨씬 초라한 자들, 그건 자기 자신의 초라함을 저항 없이 받아들여 그 안에서 무한할 듯이 좌절하는, 진정 초라해진 나의 사람들. 세상엔 행색이 초라하고 성정이 비루하여도, 그것을 사랑의 믿음으로 저항하고 안온하게 대항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지. 사람 속의 사람이고자 하는 자,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드높이려 어려움을 행하는 자, 사랑스러움의 이론을 따라 낮고 겸허한 방식으로 전복하려는 위대한 승화의 방식이 세상에 있어. 그 방식은 고귀하고 내 온 가슴은 존중의 키스를 보내고자 하나, 이 글에서는 다룰 수 없다, 이 글은 그대를 향하는 것이 아니니. 그 방식은 훌륭하나, 그럴 수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 그마저 불가한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니,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깊은 낭패감.

 

이것은 보기에 불길하고, 더불어 일말의 즐거움도 생산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 즉,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함. 은둔자들, 눈곱 만큼도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과 그로 인한 언젠가, 사랑의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함. 보편 사랑의 자격은 겸허함과 다정함이니, 그것마저 잃어버려 얼마든지 쉽게 부정되고 거부될 수 있고 실지 배제되어 온 사람, 고독보다 깊은 고독으로 떠밀려온, 나는 그대이다, 그러나 그대도 나인가. 우리를 위하기로서는 좋고 좋은 것 말고, 담보 없이 희망찬 것 말고, 보기에 고통스러운 방식을 나는 생산한다. '그것에 무엇 좋음 있느냐, 그대는 끝없는 고통 속에 우리 있음을 알면서도, 더 지독한 고통이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미리 헤아리는 것이란 오히려 헤지고 나약한 우리의 지금을 더욱 무너뜨릴 것이다. 우리는 위험한 짐생이다.' 불안에 오래 저며져, 습관처럼 두려운 미래를 고하는 사람이 드디어 이 앞에 묻는다면 내 친히 답하리. 긍휼하고 낮은 나의 사람들아, 우리는 고통 안에 빚어지는 자기 瓷器이고 자신이다. 이 말이 그저 춥고 쓰라린 아픔으로 그 눈에 닿아, 눈꺼풀을 감기려는 막대한 무력함과 복수하는 반감을 자아내고 있는 자에게는 아직 더 차가운 경멸이 필요해. 우리를 건져 올리고 구원하는 경멸이. 찬찬히 이야기해보자고. 백지는 무한하다.

 

그래 사람들아, 나의 사랑하는 낮고 초라한 사람들, 나의 형제와 자매, 본 적 없는 벗들아. 우울한 세계의 주민들 우리만이 이 쓰디쓴 세상을 안주처럼 씹어볼 수 있겠지. 실재하는 세상은 그냥 서 있을 뿐이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 속에 저마다 형상화되는 것이니까. 인간만큼이나 무수한 세계가, 저마다의 해석에 가리어진 세계가 실은 한 가지로 존재하였음이다. 사람의 이해와 상상력이란 빈약하여 몸소 겪은 것이 아니라면 좀체 이해치 못하였으니, 이건 우리가 겪고 누리며 그 안을 살아온, 우리만의 세계이다. 그리고 우리가 벗어나야만 하는 세계이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움이냐, 자기 자신이 딱히 결정하지도 않았으나 평생을 그 안에 담겨 살아온 세계를, 모조리 찢어버리고 스스로 우뚝 서야 함과 마침내 또 다른 세계를 조망하고 물색하여, 향하여, 끝없이 밀고 스스로 나아감이란. 얼마나 굳은 의지와 결심이 필요할 것이고, 자신의 나약함 따위 모조리 무시하고 뛰어넘는, 그저 뛰어넘으려 머리부터 부닥치는 사람의 어려움이 필요하겠느냐. 일견 어리석어 보이는, 비밀한 대견스러움이 필요하겠느냐.

 

그러자 머릿속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질문한다. 대낮과 명랑한 세계의 주민이. '그것이 그대의 고집이자 오독은 아니이냐, 그래 오독은 아니이냐, 사람의 세상이 다 그렇지 아니하다.' 이에 대한 항변은 충분하였으니 그만두지. 그러면 내 심상 속의 그대는 이런 반문을 이어가니이다. '그렇다면 같은 것을 보고 느끼고 누리는 그대들끼리도 만나서 정다이 얘기하고 서로의 곁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인가. 독하게 경멸하고 부정하고 찢어버리는 아픔 말고, 여전히 상냥함으로 행할 수는 없는 것이냐. 그대 말에 따르면 어차피 나는, 사랑스러운 나는 여러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여러분도 우리에 대해 마찬가지. 오히려 적대하는 것 같아, 나로서는 여러분이 낯설고 어렵고 까다롭다고. 그럼에도 사람은 누구나 서로 말하여 이해받고 서로 공감하기를 희망하니 그대들도, 그대들만의 연대로 울타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인가.' 하하, 그래, 그게 바로 어려운 점이지. 우리는 사랑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니까.

 

그 방법을 잃어버렸다 한들, 여전히 인간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잔혹하지. 누구도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 잔혹하지, 그대가 사랑에 철저히 소외되고서는 그를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진심인 만큼, 잔혹함은 커지리니. 이 명제 앞에 그대의 부정이 빨갛게 타오르는 만큼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은 명징하게 반증된다. 명심해. 한 가지 사실에 대한 가장 완벽한 대척점은 부정이 아니야, 완벽한 무관심이지. 아무리 소리쳐 부정해도 참으로 부정해낼 수 없는 것으로, 사람의 세상은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부정한들 우리로서는 그 부정에 대한 객관적 사실됨을 증명하지 못하였으니, 심지어 주관적인 것들, 감정에조차도 마찬가지. '나의 감정은 나의 것이요, 내가 천명하는 대로 정의될지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 지금 있더라면, 그대에게는 조금 더 경멸이 필요해. 누가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떨어져 자기 자신을 객체화할 수 있는가. 아무런 가치판단도 들지 않을 만큼 완전히 타자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가. 조약돌처럼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가. 의식이 자기 자신에 완벽히 흡착되어 있는 한, 아니, 의식 자체가 이 몸체의 가장 꼭대기에 매달린 무언가이고, 고로 이 몸체와 완벽히 하나인 것인 한, 우리는 자신을 참되게 대변할 수 없다.

 

이것이 이 기나긴 글의 첫번째이자 제 일 명제이다. 동어반복을 많이 한 감이 있지만, 그만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해. 내가 예상할 수 있는 한 모든 반박을 거치며 지나오느라 반복은 많고 글은 늘어지는군, 쓰는 처지로서도 피로할 일. 그러나 어느 하나도 흘리지 않고 모조리 수습해 오려면 어찌할 수 없는 것, 그만큼 내가 가리킬 수 있는 지점은 조금 더 넓어지리니. 각설, 그러므로. 거리엔 사랑이 가득해. 그건 사랑을 갈구하는 눈빛들로 있지, 사랑에 웃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나의 그대가 아무리 소리쳐 밀치고 아무리 아니라 그르다 하여도, 내 이 과격한 사상을 거둘 생각일랑 없다. 내가 분명한 만큼 생겨나는 반감과 그 자신의 반감을 두둔하고자 하는 그대를 이해하나, 그것의 증명은 그대가 스스로 하라.

 

내 눈엔 똑같아. 이미 구한 사랑과 그 이후에 일어나는 것들 말고, 보이고 잡힌 사랑 말고, 우리는 그 이면에 대해 생각해야지. 그대들이 모두 사랑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에 똑같아. 구하지 않는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슬퍼하지 않는 자는 구하지 않는가, 그럴 것이나 매우 드물겠지. 그럼 구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우린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냐. 참 구함을 일으키는 일체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 스스로 온전히 무감하다면 그럴 것이나, 무의식의 구석구석까지 추호 구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 체념한 것이 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이라 친구여. 가장 깊이 체념한 사람은, 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니, 일체 구하지 않는 자, 인간적인 많은 부분이 표백되어버린 존재와 같이, 심장이 멈춘 유기체와 같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 그에게서는 인간적이고도 인간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직 우리가 불안과 우울 속에, 너무도 인간적인 순간 속에 남겨져 있더라면, 그 원인의 자리에는 사랑이란 이름의 욕망이 자리해 있음을 명심해야 해. 그대에게조차, 아니 그대에게야 말로 무엇보다 가리어져 있는 것. 허나 무엇이 그 독한 우울을 끈질기게 생산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우리는 아픔 속에서 그를 부정할 수 없다.

 

사랑, 오, 손을 잡고 거니는 연인의 행복한 모습, 동무들과 천진한 웃음을 퍼 나르는 사람의 모습, 그런 분명하고 자명한 것은 차치하자고, 그걸 모르는 바보가 세상에 어딨나. 슬픔과 우울과 미움과 표독까지도 사랑의, 사랑하는 본능의 결과라는 것을 그대가 몸쪽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 가지 기쁨이 곧 다른 한 가지 슬픔의 기원이었으며, 한 가지 슬픔이란 곧 다른 한 가지 기쁨이 도사리는 곳임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한 가지로 포착하고 있다면,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거야. 누구나 그것을 구하고 있고, 다만 구한 자의 미소와 구하지 못한 자의 슬픔이 그저 뒤따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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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과 희비를 동시에 바라보고자 하는, 변증법적 가운데 자리. 나는 회색이다. 사람은 어느 한 가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살아가나니, 나의 믿음은 회색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쪽의 분명함도 선택하지 않는 지지부진함이 아니라, 어느 한 쪽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의 치기 어린 욕심으로서. 들여다보면 눈부신 것들과 튀튀한 것이 마구 뭉쳐들지. 좋음과 나쁨이 동시 동률로써 존재하는 모순적 세계관, 양가감정과 그를 상호 부정하는 나의 양비론적 의식 속, 결코 섞이지는 않을 이것을 나는 모조리 쥐고서 안고서 갈 거야.

 

나는 모조리 부정하면서도 모조리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완전히 긍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직, 아직은. 한 가지 사실을 온전히 택함으로써 그것을 의심 없이 또 완전히 믿는 자, 그는 의지와 상관없이 반대편을 부정해야 하기에. 고로 나는 모조리 거부하는 자, 양비론적 인간, 영영 의심하는 인간이다. 한편 도착을 바라는 자, 의심하는 자신을 두려워 희석하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여 먼 가슴 안에 품는 자, 긍정하려는 자, 그리하여 자신과 자신의 선택을 긍정하려 하기에 자신이 택하여 소속된 진영을 긍정하는 보통 사람이자, 그로부터 믿음의 자족적 다정함을 누리며 세상에 나누어주는 사람, 그런 보편타당한 가슴의 다정함이 아닌, '아직, 아직'이라고 고되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집스럽고 외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이 나를 외롭게 하였지, 다만 나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서는? 그런 내게 거리는, 이전에 세상은 사실 회색이 아니라 정신없이 모순된 공간이야. 눈 부신 빛과 시커먼 어둠이 동시에 들끓고 있는 도가니와 같지. 이 외로운 세계 속 그 모든 개별 가지를 하나로 꿰어볼 수 있을 만한 것, 본질은 오직 사랑하는 본능이었으니, 우울한 사람들과 명랑한 사람들마저 하나로 이어볼 수 있는 것, 언제나 홀로였던 나와 사람의 틈바구니에 있는 그대, 우리를 잇고 묶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느다란 실, 가느다래 좀체 보이지 않으나 결코 끊어낼 수도 없는 그 실, 종의 보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우고 있는 자를 곧 안쓰러이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필연한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그것을 필요한 것으로 스스로 바꿔내기를 기도하지. 그러므로 나는 지금 웃고 있는 자를 곧 복되이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을 생각하지. 그러므로 나는 고집스레 외로운 사람이다. 다만 나의 치기와 건방진 오만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허나 나는 마침내, 양 극단의 모순을 동시에 받아들이기 위해 어느 한 쪽 편의 지나침을 부정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닌, 그 모두를 포괄해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사상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한때 나의 치기와 오만이었던 것이, 결과적 올바름이자 마침내 이해받고 환영받을 수 있는, 즉 사랑스러운 것으로의 위대한 반전을 꾀할 수 있는가. 갈 길이 멀구나. 내 사색도, 그보다 한참 늦게 뒤좇아 따르는 나의 글, 언제나 모자라 경멸스럽기만 한, 어리석은 나의 글도. 차설.

 

 

우리 개인의 사랑, 우리가 행하는 사랑과 기억하는 사랑에는 얼굴들이 있으나, 사랑 그 자체에는 얼굴이 없는듯해. 고독한 사람 그대들은 알겠지. 얼굴이 비어 있음에도, 알아볼 표지가 없음에도 마음에 공명하는 충동을. 그대와 나, 아직 사랑할 얼굴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진동하는 이 빈 자리를 통해 알리니, 인간 자체에 대한 필요와 그리움, 사랑의 효시를. 우리가 사랑을 느낀 비로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기에 사랑할 만한 무언가가 우리에게로 걸려든 것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다시 이야기하여도 모자랄 것만 같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인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사랑 그 자체이자 요체라는 사실은! 사랑, 이보다 명료한 것이 있을까, 나는 사랑이 필요 없다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아니한다. 단 한 명의 사람도 곁에 남지 않은 사람의 얼굴엔 결코 지울 수 없는 재와 음울의 냄새가 피어나, 그대도 어떤 얼굴을 곧잘 떠올릴 수 있겠지. 그 어떤 사상으로도 그를 지워내지는 못하리, 그 잿더미 위를 우뚝 서는 사람이 적게나마 있겠으나 그의 얼굴에는 상흔처럼 긴 그림자가 드리우니, 그가 명랑하게 하지는 못하리라. 그에게 한 톨의 행복이 없노라 말하지는 않겠으나, 사랑하는 사람처럼 하지는 못하리라, 진정 자유로운 이처럼 할 수는 없으리라. 자유로운 이처럼 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사랑이 영원처럼 존재하는 한, 그대는 저항하는 사람일 뿐, 계속해서 저항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일 뿐 자유로운 사람처럼 하지는 못하리라.

 

그런 즉 사람이 있는 곳에 이미 사랑 있었음이고 그것을 대하는 얼굴이 기쁨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 슬픔으로 더욱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사람의 사랑은 참으로 까다로와 거리에, 온통 사람의 틈바구니에는 웃음소리가 있지만, 웃음소리가 자리하지 않은 가변으로는 모조리 외로움, 또는 날 선 긴장감이 가득 하다는 것이 곧 슬픔이고 그 이전에 거기 사랑이 있었음을 알리지. 그렇지 않겠어, 사랑 자체가 있고 나서야 얻은 이의 기쁨과 얻지 못한 이의 슬픔이 있는 것이니. 또한 얻은 이의 기쁨이 있고 나서야 얻지 못한 이의 슬픔이 있음이고, 사랑에 슬퍼하는 자의 눈물은 오직 기뻐하는 자의 미소를 통해 선명해지는 것이었으니. 그뿐이랴, 우리는 세상을 양 극단으로만 쉬이 인식할 수 있었으나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이의 어딘가, 회색지대에 놓여 있을지니, 얻었으나 충분히 얻지 못한 자의 불만족과 얻고도 자유로울 수 없던 그 권태와 얻지 못했으나 스스로 그리어 구하고자 하는 이의 복잡한 사정까지도, 말로써 다 일컬어보지 못할 정도로 거기에는 아마 두루 있는 것이니, 오직 분명하게 짚을 수 있는 것은 거기 사랑이 먼저 놓여 있다는 것이지, 사람이 있는 모든 순간과 공간 속에는.

 

의아하지, 보통 사랑은 좋고 좋은 것이니, 사랑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고 누리며 기뻐하는 것, 아직 그대들에게 사랑은 그런 것으로 자리해 있을는지. 그러나 사랑하지 않고서 사랑에 아파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서 사랑에 실망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사랑하고서 누구도 그에 배신당하지도 상처 입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 인간은, 나의 사랑스러운 모든 인간은 비루하게 태어났다. 그런즉 사랑하는 본능에 뒤이어 사랑의 슬픔은 필연인 것으로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은가. 누가 그러지 않을 수 있을 거냐, 사랑이 아픔이 되어 떨어지는 필연에 대해. 아직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어렵고 가변하며 가림막 없는 바람 앞의 불꽃처럼 흔들리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푸른 가슴과 붉은 눈을 한 소녀와 소년들에게 사랑이 아픔이 되어 떨어지지 않는 방법이란 없는 것이 아니던가. 처음부터 우아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온갖 사랑의 부산물들, 잡다구니하고 범박하기 그지없고 심지어는 쉬이 추악해지기까지 하는 이 사랑의 그림자마저 필연처럼 받아들이고, 그렇게 다소복한 이별을 음미하기를 애초부터 기대할 수는… 아픔에 충분히 저며지며 성숙해지는 영혼이 아니고서야, 그런 것들을 어떻게 그저 좋은 것을 대하는 듯이 처음부터 행할 수 있는가.

 

사랑은 좋고 좋은 것이나 가지었을 때나 그러함이요, 심지어 가지어 그치고 완성되는 것도 아니었음이니, 하나의 사랑을 얻어 그 사람이 영영 행복할 수조차도 없는 것이었잖아. 그런즉 사랑은 끝없는 아픔과 슬픔의 과정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길, 그리로 우리를 인도하는 잔혹하고 보드라운 손길이다. 고로 사랑을 구하는 모든 모습은 그 끝에 희망과 환상처럼 매달려 있는 구원과 이상을 향하여 부나방처럼 이끌리는 모습이되, 거기에 수반되는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의 결연함을 수반한다. 모든 사랑이 이런 찬란함으로 펼치지 않았으나, 그러한 미약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이 곧 위대함이지. 사랑이 그리하리라, 사랑이 우리의 피동성과 나태를 찢어 그토록 어려운 길을 내몰고, 고통을 통해 우리를 드높이게 하는 보드라운 손길이요 우리는 비루하나니, 한편 눈곱 만큼도 사랑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더러는 누군가 그 자신을 대하여 그리하듯이 참으로 무관심하리. 사랑하는 본능이 없었더라면 일체 구하지 않고, 구하지 않고서 피어나는 사랑이 없고, 웃음도 울음도 없고, 그때 비로소 사랑에 상처받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사랑하는 본능이 없었더라면, 관심이 없고 기대가 없고 고로 만물을 대하여 무료하고 무심하게만 바라보고 있었을지니, 눈길을 끌 무엇도 없는 버려진 일반 쓰레기봉투를 바라보는 듯이 하겠지, 또 남루하고 더러운 털에 뒤덮인 볼품없는 강아지를 보는 듯이. 사랑하는 본능이 없었더라면 일체 사랑스러움이 없고, 비로소 이 긴장스러운 사람의 관심과 기대와 평가는 오직 행하는 이의 번거로움으로써, 거리에는 대신하여 완벽한 무관심이 자리했을 거야. 그게 바로 사랑의 완벽한 대척점이자 그 빈자리이지, 무관심한 권태. 사랑의 반대편에는 증오가 아니라 완벽한 무관심이 자리한다. 명심해. 사랑의 반대편은 증오가 아니야 나의 친구들아. 그대들이야말로 이것을 잘 알고 있겠지,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적의가 아니라 완벽한 무관심이라는 것을. 무관심은 우리 비루함, 본질적 나태의 소산. 사랑이란 이름의 욕망이 우리를 그로부터 건져 올려 능동적으로 행하고 오래 들여다보게끔 하는, 꾸준하고도 막대한 힘이다. 다만 그 훌륭한 힘인 사랑에도 조건 있으니, 그것이 사랑스러움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이 본능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은 사랑스러워지기 위한 모든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겪어온 좌절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참으로 나는 조용하고 깨끗한 새벽 속을 살 수 있지 않은가, 홀로, 고요하게. 그대는 아직도 이리 반문할 것이냐. 이게 그대의 빈약한 상상으로 그리고 고대한 관조이냐. 그건 끔찍한 허무이다. 그대가 그리는 것은 끔찍한 허무이다. 완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도 사랑할 수 없음을 뜻하기에, 오직 그렇게만, 그런 방법으로서만 가능하지. 그대의 의식이 본능을 취사선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는 말아. 그렇게 생각하려 드는 사람이야 많지만, 그게 참으로 그렇게 되어질 값이었다면 세상은 자기 입맛대로 살아가는 황홀한 인간들로 더욱 풍부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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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아지만을 참으로 사랑할 것이다, 고양이만을 참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 외 다른 것은 꿈에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바란들 조금도 사랑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행할 것이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것은 알고 있겠지? 그대가 사랑을 택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본능이 그대 가슴 속에 마구잡이 사랑의 대상을 밀어 넣은 것이다. 본능은 막대한 흐름이자 힘, 극단적인 것. 존재하거나 제거되거나, 이분법적이지. 우리의 빈약하기 그지없는 의식이 생명의 본능을 좌우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지 말아. 그렇게 단단히 믿는 사람이야 그 얼마나 많지만, 그건 아직 무지하거나 왜곡하여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허나 무지한 자라면 내 가슴은 걱정하지 않아. 그에게는 장차, 자신의 세계가 깨어지며 생겨나는 막대한 공황감, 위대한 교훈이 반드시 찾을 테니. 단 한 번도 자신의 세계, 철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 주관 세계가 깨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사랑은 모든 것을 찢어버리는 위대한 힘, 심지어 자신의 사상마저 찢어버릴 수 있는 위대함. 사랑만이 우리의 에고와 자기보호의 본능이 배설해대는 자기애적 환영을 찢어버릴 수 있었고, 스스로 택한 편안함과 완벽한 자족감의 탑을 부숴버려, 그렇게 우리를 그렇게 드높이게 하지. 다만 원치 않는 방식으로 또,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즉, 가장 보드라운 방식에 수반되는 폭력으로.

 

하지만 왜곡하는 자라면 걱정해, 그가 왜곡에 더없이 탁월할수록.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믿는 세계에 금이 갈 때마다, 본능적으로 예견되는 공황감을 결단코 꺼리어 두려워하는 마련이니. 신념의 파괴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가슴은 유약하였으니. 제 손으로 자신의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건 처음에 세계로부터 강제로 주어지는 것, 폭력당하는 듯이. 주관 세계의 파괴, 자신의 모든 긍정하는 믿음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리는 사건. 실재하는 세계는 어제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으나,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멀어지고, 철저히 혼자가 되어버리는 감각. 단 한 순간의 속도로 이 모든 것이 증발하듯 멀어져 버리고 한 치 앞에 있던 세계가 10리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버린다, 찰나에. 사물이 초속 1km의 속도로 멀어지는 가운데 느껴지는 현기증과 구토감, 그것은 파괴되는 자기 세계 가운데서 개인이 겪게 되는 전율의 비유.

 

고로 왜곡에 더없이 탁월할수록, 나는 걱정한다. 누구도 처음부터 이 전율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에. 다만 저항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매다 꽂히듯 쏟아지는 그 현상 앞에 웅크리며 버티는 것이 우리의 모습, 무력한 것이 우리의 실지 모습이었지. 얼마나 필요한 그 무력함이더냐, 그러나 왜곡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세계에 일어나는 균열을 왜곡의 장막으로 촘촘히 매우려한다. 그렇게 할 수 있기에 그저 그렇게 행한다. 그러나 균열은 계속해서 커져만 가고 그는 더욱 커다란 왜곡의 장막을 드리워야만 해.

 

아, 물론 축복하지, 그대 스스로 시커먼 바닷물이 비집고 솟는 나룻배의 바닥 균열을 메워냈을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안도감과 자신감을 이해하기에. 그대가 '지금' 행복하다면야, 그대에게 다른 무엇이 중하겠어, 그렇지. 어차피 비관적인 습관이 자아내는 불안 또한 허상이자 미리 확언할 수 없는 것이었더라면은, 긍정적인 믿음이 또한 필요치 아니한가. 나는 그러한 사람의 사상을 이해한다, 자연스러움의 인과를 따르는 의식적 흐름. 허나 그대 마음속에 솟지는 것이 그뿐이더냐, 그대는 영영 배가 부서질까 침몰할까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 있음이다, 불안을 넘어 더 큰 불안 속을 표류하는 사람이 되어 있음이다. 그대도 알잖아? 그대야말로 알아야 하는 이것이 아니냐. 고로 나의 축복은 의지와 상관없이 그대를 빗겨나게끔 점지되어 있다. 왜곡이 깊어질수록 그는 돌아올 수 없다. 차례차례 나누어서 일어나야 할 것들이 단번에 몰려오는 꼴이 되는 것이니까. 유약한 사람의 정신이라면 회복하지 못하고 좌절해버릴 수도 있지. 나는 들었다, 그러한 사람의 영혼이 지르는 단말마를.

 

아직도 그대는 묻는가, 반문하는가. 반문에 대한 나의 반문, 주관 세계는 애초부터 깨질 운명을 점지받아 있다.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지, 그게 얼마나 긴지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일 뿐.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굳이 해설과 주석이 필요한 명제인가, 설명과 납득이 필요한 명제인가, 누가 있어 이미 완결된 세계관, 오류 없는 세계 인식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 자신 홀로서 사랑하는 사람처럼 명랑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오직 이기적인 본능과 자기보호적인 사상을 꽉 쥐고서, 영영 홀로인 채로도 가득한 행복 속을 살아갈 자만이 내게 돌을 던져라, 그러나 지금 던지는 그대도 바로 그 사람처럼 할 수는 없으리다. 사랑하는 한 우리가 사랑하는 타인으로부터, 희구하는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기 의심과 자기애의 위기, 부정당한 신념 위로 싹트는 가장 참되고 진실한 자기불신을 피해 갈 수는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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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대의 의식이 본능을 취사선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는 말아 주. 본능과 감정은 하나의 원리로 이어져 있는 것이니까. 사랑하는 본능이 있음으로 하여 사람이든 강아지든 고양이든 별과 풀꽃이든, 하여간 오감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이 막무가내 사랑으로 편입되는 것이지, 의식으로 선별하여 느끼는 것은 결코 못 되는 것이니까. 의식이 사랑할 만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선별하려 들고, 열심히 행하려들 수가 있을지언정, 오직 그렇게만 진실히 느껴볼 수가 없음이니. 그대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건 그건 그대의 자유이나, 그대의 사상이 그런 식으로 왜곡되게 자리 잡아 버리는 것을 나는 거부한다. 언제나 정답으로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지, 그러나 사상이 정답을 내리고 굳게 믿어버리는 것은 내 것으로도 그대 것으로도 위험한 일이니. 지금도 강아지와 고양이에게만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있겠지, 나는 그대들의 행위를 부정하는 게 아니야. 응원하지, 그대가 나의 이 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허나 나는 그것이 틈없는 사실이자 진실됨이라고 생각하려는 본능의 작태를 걱정한다, 필연히 왜곡을 수반하는 일인 까닭에. 고로 나는 다정한 마음으로 말한다, 그대가 아프게 생각하기를 바라. '나는 인간에 지쳤다, 인간은 비열하고 비루하고 저열한 족속들이다, 개중 좋은 사람이 있는 것쯤이야 이해하나, 그런 사람은 내 곁에 없었고 그런 사람들마저 고려해, 상상으로나마 그를 기리고 추앙하기에, 인간을 찬미하기에 내 심장은 낡고 헤졌다. 차라리 나는 순수한 존재들만을 사랑해야지. … … 그러나 사실 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지쳐 잠시 쉬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오직 그대가 일체 사랑을 버리는가, 마지못한 마음으로 붙잡는가 하는, 단순한 문제만이 남는다. 그러나 무엇도 사랑하여 고대하지 못하는 삶이란 얼마나 가혹한 황량함으로 변모될지 생각해 주. 사랑하는 본능이 이토록 장대하여, 우리를 끝없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어 나를 힘들게 하였음에도, 그건 안고서 가야만 해. 답으로 정해두고서 그저 나아가야만 해. 정해진 이 본능이 또한, 잘라버린 다음에는 재생하지 않기에. 영영 잃어버린 다음에는 되돌릴 수 없고 되돌아올 수 없으니. 그런 비로소 눈앞에 펼쳐지는 무한한 허무와 공허한 세계, 아무것도 심어볼 수 없는 대지에 던져져서는 되돌아올 수 없어. 파종을 포기한 그대 가슴의 대지에는 어떤 기대의 씨앗도 피어나지 않는다. 무엇도 기대하고 꿈꿀 수 없는 삶, 무엇도 나누어 소통하기를 희망하지 않는 삶이란! 그대의 지금 삶이 이것과 얼마나 다르냐고 되묻지 말아, 그대에게 소통하는 기쁨이 없을지언정 그에 대한 기대마저 구축된 삶에는 아픔 대신에, 끝없는 권태와 허무만이 놓인다. 그러면 내면에 남아 있는 것이 오직 심연뿐이라는 것을 뒤늦게 마주하고 목도하게 되겠지. 그대를 주시하는 검은 구덩이 속 눈동자. 아, 아직 심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구나. 이 또한 차설.

 

그러므로 사랑이란 아픔에 좇기어 계속해서 밀고 나아가는 삶, 그것만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줄 것이다. 눈물로 얼룩진 기쁨, 아, 역설이. 기나긴 시간 동안 고독하였던 나와 나의 그대들에게 허락된 좋음과 나아갈 올바름은 이것뿐이다. 삶에 정답이 없노라 말하며 반발하려는 사람들아, 삶의 미시적인 부분으로는 정답이 없으나, 총체적이며 거시적인 것으로서는 정답이 있다, 사랑하는 것, 우리는 사람 속의 사람이 될지어라. 그리해 마땅할 지어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낭패하는 사람과 거부하려는 사람, 사람의 자식 누구에게나 주어진 답은 정해져 있었고 언제나 문제는 그 방법이었을 뿐.

 

그러므로 곧이어 나의 방법과 어조를 문제로 삼는 사람들아, 보드라운 인내와 온유한 다독임, 아픔 없는 다정함을 올바른 유일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아, 나는 나의 몸으로 말한다. 어떤 사람의 정신은 안온함으로 그 매듭을 풀어헤치지 못할 만큼 가득 엉키고 헝크러져 있다. 어떤 사람의 정신은 광기의 직전에서 위기를 예감하매 더 이상 몰락하지 않기 위하여, 가득 가시를 드리우고 있다. 어떤 사람의 표독은 그 자신을 지키고, 또한 타인을 지키기 위한 아주 지독한 역설이다. 그대의 다정함이 우리의 혼란과 광기와 표독만큼 질기고 길이 갈 것인가, 그대의 다정함이 마치 일체 헌신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우리를 비추어  줄 만큼 강대할 것인가, 제 몸에 불을 붙여 우리를 비추이는, 더욱 커다랗고도 위대한 역설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칭송하여 기리고 찬양하리라, 그대가 나의 신이고 구원이다. 그대의 다정함이 한 사람을 구원할 만큼은 총체적인 것이라면, 한 명의 사람을 대하여, 말하자면 10년을 지속하는 꾸준함이라면 그대가 나의 신이 될 것이다. 허나 나는 그러한 다정함이 지니는 무력함을 보았고, 그 다정함이 채 풀어헤치지 못한 광기들을 보았고, 어쩌면 너무 많이 보았고, 땅에 내팽개쳐진 채 길 잃은 눈동자를 보았고, 내가 그 사람의 하나였으며, 지치어 웅크린 슬픔의 정수리들을 보았고, 영영 남겨져 버린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그런 우리를 구원치 못하여 차마 도망친 그대를, 잘못되었노라 생각하지 않아, 내게 사랑을 포교하였으나 끝내 소스라쳐 도망간 사람아. 다만 그대와 나, 어느 하나 버림 없이 모조리 이해하기에 말한다. 슬픔과 한없는 안쓰러움으로, 애처로움으로 나는 말한다. 우리는 오직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한 사람을 온전히 건져 올릴 수 있는 자는 그 자신뿐이다.

 

그대들의 다정한 방식이 좋이 향해볼 사람들은 이 글 바깥으로 밀어두었으니, 그대는 믿어온 대로 행하라, 그대와 나의 방식이 가지는 의의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세상에 다정함이 훨씬 중히 필요함을 아나, 다만 그건 이 독한 사랑의 바깥에 있음이며, 여기 빗대자면은 훨씬 많이 있음에 불과하니이다. 다만 서로 아득히 먼 그대와 우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 그대야, 그대 또한 우리로부터 상처입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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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호한 분명함이자 폭력적인 사랑의 명제, 답은 정해져 있고 언제나 문제는 그 방법뿐. 닿아볼 답에 먼저, 그 방법을 찾지 못해 체념하며 그럭저럭 살 만한 타협 안에 머무르는 사람 우리들아, 우리를 건져 올릴 이는 자기 자신 뿐. 나약한 모든 사람들아, 애초 인간의 정신은 유약하다, 우리는 비루하게 태어났다. 이 말을 얼핏은 이해하면서도, 그대의 정신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 속의 망설임을 행하는 사람들아, 유약함을 몸소 이해하는 나는 우리에게 이토록 뜨겁고 강렬한 의지가 절실하였음을 목놓아 소리친다. 데일 듯 뜨거와 불편하고 불쾌한 진실과 그에 대한 항거할 수 없는 무력함, 뒤잇는 체념까지 이해하노라. 고로 곁가지를 모조리 불살라, 오직 한 가지 길만을 나는 권한다. 울력하듯이 강요하듯이 강제로 떠넘기듯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내가 가리라.

 

지금 우울과 공황보다 더욱 무섭고 두려운 것이 우리의 안에 있다. 허무. 모든 삶은 그 허무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을 띠고 있다. 허무가 어디서 올지 모르고, 하늘에서 검은 비처럼 내리는가, 땅에서 덩굴로 솟는가, 동풍으로 오는가, 서풍으로 오는가를, 그러므로 어느 방향으로 도망쳐야 할지를 모르나 우리는 가야 한다. 영영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망연하고 때로는 지독히도 절망적이나,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그저 나아가는 삶, 그것만이 사람의 구원이다. 나는 언제나 '아직, 아직'이라고 말한다, 기쁨과 구원은 영영 아직이나, 그러므로 가장 높이 오른 사람에게 가장 지극하지도 않을 것이나, 가장 오래 걸어가는 사람의 주변으로 서서히 내려오리라,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함으로. 그때서야 이해되는 것, 구원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한 것은, 그저 걸어가는 것뿐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모든 지난한 생애와 그에 대한 의심이, 피할 길 없는 것인즉 필연이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기나긴 고해가 그대의 심장부로, 모든 것을 불신하는 심장으로 곧잘 닿을 수는 없겠지. 그대의 사상이 여러 겹의 필터로 보호하고 있는 곳, 그 겹겹을 벗기내거나 꿰뚫어 강력하게 가닿을 수는 없으리. 또한 그대가 처해있기를 오래 한, 끔찍한 정신의 고통과 공황감에 비하자면야 왜곡하는 이의 불안 혹은, 체념하는 이의 허무는 더욱 낫다 여기어질지니, 그 또한 사람의 당연함이니다. 당장의 고통이 정신을 헤집어놓고 있는 사람에겐 이 아픔과 안녕하는 것만이 최대한의 소망이고, 그 이후에 것까지는 생각이 잘 닿지 아니하리, 우리의 의식은 참으로 빈약한 것이었으니.

 

허나 그렇게 일단락하여 의심 없이 여기고 치워버리기엔 인생은 너무 길기에, 나는 그저 고요하게 그대를 바라보리다. 그리고 먼 언젠가, 기나긴 길을 돌아 그대가 이 말 앞에 서리라. 허무는 존재와 의의 자체를 풍화시키는 것. 지금 그 경계를 거니는 사람이야 얼마든 많지만, 그 안에 머물어보려 하는 사람이 또한 많지만, 그건 감히 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소망과 사랑은 우리가 정신의 애 碍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끝없이 저항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의 분명함, 아집에 가까운 신념과 오기이다. 다른 곁가지 길, 만약으로 드리워진 길을 나는 전부 태워버릴 것이야.

 

답은 정해져 있고, 중요한 것은 오직 방법뿐. 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자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은 이미 정해진 인간의 답, 인간 속의 인간이기 위한 단 한 가지 계율이다. 그러므로 관심은 그러한 사랑을 찾는 눈길이요, 사랑스러움이란 그러한 관심을 이끌어 사는 모든 것. 사랑스러움, 그것이 비단 외견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이해하고 있겠지? 앞서 길게 나열하였으니 반복하진 않겠어. 아름다운 외형이든 매력적인 성격이든, 아니면 다채로운 흥밋거리든, 혹 편안함이든 무엇이건 간에,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움이다.

 

사랑스러움, 그것은 사랑하는 자의 눈에 비로소 걸려드는 것, 그러므로 사랑하려는 자의 두 눈이 고이 쥐인 소망. 누군가의 사랑스러움을 쉬이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 자기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려 한다, 만들어내려 한다, 사랑의 상승작용. 그러나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과 쉬이 사랑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그러지 못하였음이니, 그는 눈물 속에서 청하였다, 사랑하는 본능을 소멸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렇게 행함으로써 비로소 모조리 벗어난 저편으로부터 안식을 누릴 수 있으리라. 허탈한 목소리로 나는 응원하리,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은둔자들을 방으로 집어넣는 마음은, 인간에 대한 본위적인 그리움보다 커다랗게 자리하는 그 마음은 이 거리의 사정과도 맞닿아 있지. 이미 미움과 질투를 넘어 익숙한 체념을 넘어 당연한 것마저 되어버린 것, 사람의 까다로운 사랑과 그에 대한 패배감과 깊깊은 체념, 나는 누구보다 그것을 안다. 나는 사람의 틈바구니에서 언제나 이러한 것을 느낀다. 금요일 밤의 이태원역을 막 나서면, 서로 무리지어 웃는 사람들과 서로 날 선 긴장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천진한 미소를 뿌리던 그 얼굴로, 곧이어 다른 누군가에게 싸늘한 눈길을 날리는 것도 보았지, 개중 더러는 내 얼굴을 향하여 화살처럼 쏘아지기도 하였다. 눈에서 극지의 냉기처럼 흘러넘치는 무심함, 적의, 오만, 치기와 가시 등을 읽어, 그건 그다지 놀라움도 아니이다, 내게 그러한 체험이 적었을 적에야 그것은 두려움과 공황이었으나, 내게 그것은 만연함과 익숙함과 그에 대한 체념감을 지나, 한 가지 인과에 의한 자연스러움이 되어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의식해, 그건 사랑의 작용이라 하였지. 그러나 의식한다고 모조리 기쁘게 바라보고 행복으로 여기지만은 않았으니, 외려 우리는 인식하고 의식하기를 서로 하며, 서로 간에 긴장하고 두려워 불신하는 동안 저도 몰래 생겨나 버린, 어리석고 편협한 자기보호의 본능과 불쾌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오만한 평가들을 마구 내던졌지. 마치 배설하듯이. 어리석고도 어리석고 그보다도 어리석은, 그러나 이것이 또한 자연스러움이다. 나는 그런 것을 '인간적'이라고 부른다. 내 인식 속에서 인간적인 것, 더없이 인간적인 것들은 모조리 비루함에 기초한다. 그걸 알고서 가야 하고 알고도 가야 해, 이미 답은 정해져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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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씨앗이요, 그것의 열매를 두고서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을 모든 것의 시작인 씨앗으로서 말한다. 우람한 열매로써 늠름히 자라난 것만을 사랑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 기원이자 무궁함, 본능과 그러함, 자연으로써 말한다. 그러므로 기원을 말하는 사람은 두 가지 열매를 모두 일컫는 사람이다. 자라난 것과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가능성 속에 죽어버린 것을. 사랑의 본능을 말하는 것은 달콤함과 쓰디씀을 모두 일컫는 행위. 그리하여 우리가 인간에 의해 아프고도, 그토록 더욱 아플 수가 있었다는 사실과 아프고도 계속하여 다시 일어나는 꾸준함이 있었다는 사실과 거듭날 수 있었음과 또한 그토록 행복할 수 있었음과 커다란 행복감에도 돌연 그마만한 슬픔과 불안함으로 뒤바뀌어 전율할 수 있었음과 커다란 행복감보다 더욱 커다란 아픔과 추락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이미 우리에게 지정된 본능이고 가장 기초적인 운명이라는 것을 말한다. 장차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들여다볼 때에도, 이 난대로 주어진 기초적인 것으로부터 뻗어 갈 것이다.

 

나는 말한다, 그러니 사랑은 영영 벗어날 수 없는 명령이라는 것과 그러므로 그것을 이해하고 순응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여정을 출발하리라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에게 한 줌의 미움도 없겠느냐만, 사랑스러운 사람, 그에게는 사랑이 먼저 기쁨으로써 찾는다. 바람이 감기는 듯이, 숲길을 가득 찬 녹음이 산책하는 존재의 주변으로 감아도는 듯이. 이미 사랑스러운 사람, 그리하여 마음이 정답고 평화로와 주변에 똑같은 것들을 흩뿌리는 자, 나는 그런 사람을 축복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르러 내 축복은 무가치한 것이 될 까닭이요, 그를 위한 축복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명랑한 사람을 위한 축복은, 나의 수고스러움에서 찾을 필요도 없이 이미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랑해, 존중해, 긍정해, 이런 격언들이 세상에는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나의 축복은 만신전의 축제에 난입한 슬픔과 우울의 신과 같아, 불길하고 음울하면서도 어딘가 신비로운 것. 남루한 누더기에 쌓여 쉬이 알아볼 수 없는, 그런 보배로운 역설을 드리리. 우리만을 위한, 드물고 드물며 어려운 축복을.

 

그리하여 이렇듯 세상에는 애초에 사랑이 먼저 있었고, 그다음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어, 이름 한 자 모름에도 지닌 바 사랑스러움을 곧잘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이가. 그런 즉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도 있지. 그건 눈 부신 빛이 존재하는 순간으로부터 필연히 어둠이 태어나는 것과 같이, 단단하고도 간단한 인과로 엮여있는 사실. 빛이 있으라 명하신 순간으로부터, 의도였든 의도치 않았든, 어둠의 탄생을 명하심이 같이 있었듯이. 

 

사랑스럽지 않은 나의 사람들아, 우리, 겪었던 각자만의 우울을 펼치어 만찬 하자. 슬픔만을 노래하자, 그러나 그 끝은 반드시 찬란하게 끝맺어야 해. 모든 음악들이 그러했듯이. 그대들, 깊은 곳에 자리한 비애를 꺼내어 포틀럭을 준비하라, 그러나 각자의 서사는 끝에 이르러 반드시 찬란하게 맺어야 해. 슬픔이 슬픔으로만, 우울이 우울로만 끝맺어서야 우리들의 만찬은 고대할 만한 것이 될 수 없기에. 끝내 자랑스러운 것이 될 수 없기에. 그러니 우리는 슬픔을 토하고 또 토하며, 마침내 그것을 향기로운 비애로 성숙하는 지혜와 한가지 사실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뒤바꾸어 버릴 줄 아는 역설을 준비해나갈 것이다. 자, 이제 사랑스럽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결과와 현재가 어땠든, 그대, 우리는 사랑스러우라. 과격한 사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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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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