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극단적 양면 세계 속 폭력적 영웅의 탄생 [영화]

글 입력 2023.12.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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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는 흔히 ‘마케팅 실패’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주인공 병구(신하균)가 개조한 안전모를 쓰고 물파스를 들며 ‘혹시 당신, 외계인?’이라며 익살스러운 웃음을 짓는 포스터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sf적 상상력이 가미된 그저 그런 코미디 영화라고 치부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누구 하나도 이 영화가 외계인 납치라는 소재로 소외계층의 분노와 고통, 불행, 힘에 의한 사회적 지배구조를 보여줄 것이라곤 쉽게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 페이크 마케팅을 의도하였던 것처럼 이 영화는 관객을 정말 ‘속인’ 숨은 걸작이 되었다. 많은 평론가가 말하듯 이 영화는 장준환 감독의 독특한 블랙코미디를 담은 엽기적인 데뷔작이 되었다.


<지구를 지켜라!>가 지배구조에 의해 고통받는 약자를 다룬 이전 영화들과 궤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2003년 이후에 등장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과도 차별화되는 지점은 있다. 이 영화는 환상을 통해 파괴적인 위로와 고발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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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유제 화학의 사장이자 권력층인 강만식(백윤식)을 외계인이라 확신한 병구가 순이(황정민)와 함께 강만식을 납치하면서 유쾌하게 시작된다. 병구는 지하실에 강만식을 묶어둔 채 고문한다. 그 고문은 발등의 살갗을 벗겨내어 그 위로 물파스를 바른다거나, 머리카락을 모조리 밀어버린다거나, 손바닥에 못을 박거나 하는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나는 이 영화가 수작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영화를 통해 숨겨진 치밀한 메타포와 수많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데, 이는 영화를 접한 이마다 독자적인 해석이 가능케 하고 매번 새롭게 다가올 수 있도록 만든다. 대략 2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여전히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에 이 영화가 여전히 수작으로 꼽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작품에 숨은 것들을 파헤치며, 영화 속 메타포 및 미장센과 의미 분석에 집중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양면 세계에서 수평은 평등이 아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극단적인 이분법적 구조를 띠며 극을 진행한다. 그에 활용되는 직관적인 메타포는 500원 동전이다. 추 형사(이재용)는 강만식 사장을 납치한 범인을 수사하며 500원 동전의 앞뒷면을 번갈아 보여주곤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이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50%이며, 범인 또한 ‘범인이거나, 아니거나’하는 50%의 확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러한 양극단 구조는 영화 속 지배구조를 명실상부하게 드러낸다. 범인인가, 범인이 아닌가. 지배층인가, 피지배층인가. 외계인인가, 지구인인가. 실험자인가, 실험체인가. 이 영화의 세계관에서 중간과 같은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30%라던가 하는 애매한 수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저 50:50의 확률로 이루어진 세계는 상하 관계, 즉 수직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세계처럼 보인다. 이 수직구조 안에서 어느 한쪽에 속해있을 경우 누군가는 분명한 이익을 얻게 되고, 누군가는 억압과 고통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한 구조를 점진적으로 확장해가며 분석해보면 우리는 영화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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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구가 살던 푸른 행성 ‘지구’,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은 병구에게 있어 포식자의 세계이자 부당한 사회이다. 병구의 과거는 대체로 폭행당하고 핍박받는 삶이었다. 병구는 과거를 떠올릴 때면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던 꼬마 우산을 갖고 놀던 기억 외에는 대부분 불행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만이 점철되어있을 뿐이니 말이다. 빚쟁이들과의 실랑이에서 아버지의 관자놀이에 꼬마 우산이 꽂힌 것을 목격하고(이후 돌아가신 듯하다), 조금 더 자라 학교에서는 담임 선생님에게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당하고, 학교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표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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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구는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았다. 이때 학교와 교도소에서 연속적으로 사용된 기다랗고 딱딱한 연장은 지배적인 방식의 폭력성에 대한 상징적인 메타포가 된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를 제압하기 위한 도구로 기다란 막대가 쓰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시위나 폭동을 제압하기 위해 군경이 시위진압봉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에서도 병구가 제압당하는 장면들은 대부분 그런 방식으로 연출이 되었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병구가 제압을 당하는 인물, 즉 어느 환경에서건 억압당하는 동시에 침묵을 종용받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를 경험한 병구는 강만식을 고문할 때도 기다란 철봉을 사용한다. 이렇게 병구를 중심으로 나누어지는 극단적인 두 부류, 제압하고 제압당하는 인물을 통해 이 영화가 중심적으로 말하고자 한 내용이 지배관계임을 확실히 하게 된다.


그러나 후반부로 향하면서 기묘한 지배관계가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외계인-지구인이다.


절정에서 결말로 치달으면서 우리는 병구의 말대로 강만식이 외계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병구가 겪었던 모든 불행은 이들 외계인의 개입을 통한 것이었다. 결국 강만식 또한 이익의 목적으로 지구인을 지배하에 놓고 실험한 것임이 다름없다. 이에 고통받는 건 병구와 병구 모와 같은 피지배층이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이 안드로메다 PK-45 행성의 왕자(강만식) 캐릭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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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가조작, 비리, 갑질, 연예인 스폰 등 전형적인 권력층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은 인물이다. 영화 속 외계인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그에게 이러한 자본주의적 설정을 부여함으로써 강만식이 지구인인지 외계인인지 헷갈리게 한다. 강만식을 통해 외계인 또한 지구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외적인 것 말고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면모)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도 병구가 가하는 힘 앞에선 무력하게 고문당하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장준환의 괴물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외계인 (…) 등의 표현을 제시하는 것은 페이크(fake) 모션에 가까울 것이다. 괴물은 외부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부에도 동시에 있는 것인데 마치 그것이 외부에 존재하는 무언인 것처럼 시선을 교란하는 작전인 것이다.”

 

- 이청, 「경계와 금기에 대한 폭력적 대응: 장준환론」, 『현대영화연구』 22,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 2015, 5면.

 

 

이러한 교란 작전은 외계인-지구인의 지배관계 또한 같은 종족을 실험하고 지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다시피 안드로메다 PK-45인의 유전자 구조는 인간과 똑같다. 그렇기에 다분히 생각해보면 왕자가 “이 우주 어디에도 니들처럼 같은 종을 학대하고 그걸 즐기는 생물은 없어!”라고 했던 말은 호소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는 다시 말하면 모순이기 때문이다.


강만식은 타종족을 통해 자종족의 이익을 취하려 했다. 사실상 그들은 자신들과 유전자 구조가 같은 인간을 생성해내 관찰해왔고,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폭력 유전자가 자신들 외계인에게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제거하는 실험을 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구인들이 행했던 인류사적 지배, 즉 식민지배 사상이나 생명 유린 행위와도 맞닿아 있다.


감독은 이러한 외계인-지구인의 지배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의 지배구조에 대한 모순성을 드러낸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보면서 외계인이 지구인을 실험체로 사용하고 지구를 폭파하는 것에 부당함을 느꼈다면, 현재 당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순들에 대해 부당함을 느껴야 함이 당연하다. 그러한 메시지를 이 영화는 던져주고 있다. 외계인을 통해 느낀 기이함과 모순을 통해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지구라는 행성의 폐해에 대해 일깨워주는 것이다.


500원 동전은 양면이고, 두 면은 서로 마주 보지 않고 항상 다른 방향을 본다. 지구라는 행성에 있는 한 500원 동전은 중력에 의해 어느 한 면을 깔아뭉갤 수밖에 없다. 어쩌다가 동전이 우뚝 서 있게 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가 공평해 보이는 듯해도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그 위태로운 평등은 다시 무너진다.

 

이처럼 양면 세계로 이루어진 한, 이 세계의 지배구조는 계속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될 것이고, 서로 이해하지도 화해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를 힘으로 눌러야만 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주인공 병구에게서 드러나는 피지배층의 양상


 

병구가 자라온 환경은 모두 힘에 의한 지배적인 환경이자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곳이었다. 약자는 그저 웃고 아무 말 없이 맞을 수밖에 없는 곳. 그러다 한 번 반항이라도 하면 더한 피해를 받는 불합리한 세계이다.

 

병구가 학교에서, 그리고 교도소에서 공공연하게 폭력을 당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사회에서 문제가 됨과 동시에 ‘정의’라는 것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강만식이라는 지배층이 납치됐을 때이다. ‘정의’는 병구가 고통스러울 땐 숨어있다가 강만식이 위기에 처할 땐 모든 형사가 총출동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그것이 비록 같은 폭력이라는 행위로부터 생겨난 일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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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구는 약방에서 파스를 사다가 자신을 괴롭히는 동창을 만나게 된다. 이때 병구는 그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때 특유의 절도 있는 액션과 위에서 덮쳐오는 로우 앵글로 병구의 힘이 과시된다. 이후 사람들은 병구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는데, 이는 전형적인 영웅물이다. 이처럼 지상에서는 쉽게 할 수 없고 상상에만 그친 것이 지하실에서는 가능해진다.


병구는 온갖 고문을 하며 외계인이라는 빌런에 대항한다. 따라서 지하실은 병구의 욕망을 표출하는 공간이 된다. “폭력은 무자비하고 집요해서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힘만 있다면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인해 “힘은 나를 비참하고 억울하게 만드는 억압적 폭력인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 된다. (고정호, 「힘에 의한 타자화와 뒤틀린 자아상: 영웅이미지 범람 시대와 개인의 좌절」,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28면)


이러한 억압적이고 불공정한 힘의 세계는 병구와 같은 폭력적인 영웅을 탄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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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피지배층의 고통을 강조하기 위해 색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조명과 색감 보정을 통해 전체적으로 녹색과 푸른색이 느껴지도록 하는데, 이때 이 색감에서는 희망의 상징성이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초록색, 푸른색이라고 하면 대개 쾌활하고 희망찬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사용된 색감은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영화 <트와일라잇>(2008)이나 <올드보이>(2003)의 장도리 액션 장면처럼 초록색의 색감을 사용할 경우 오히려 차갑고 갑갑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구를 지켜라!>는 전체적으로 바닥과 벽이 이끼 낀 듯한 눅눅함, 지하실 같은 공간과 여름이라는 계절감을 활용하면서 꿉꿉하고 끈적한 느낌을 극대화한다. 즉 불쾌감을 전달하는 색감으로써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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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만 아니라 보색인 붉은색을 활용하여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중 가장 대조가 잘 이루어지는 장면은 병구가 과거 환각에 사로잡힌 장면이다. 위 장면은 지하실의 녹색을 보여주다가 병구가 과거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환각을 보는 순간을 붉은색으로 임팩트 있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병구라는 인물이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보이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낸다.


그러나 폭력적 영웅 병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외로움과 소망이 있다. 이를 그의 직업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에게는 두 가지의 직업이 있다. 하나는 마네킹 제작자, 하나는 양봉업자이다. 대외적으로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 삼은 직업일 수도 있으나, 이 직업은 병구의 무의식적인 소망이 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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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구는 왜 마네킹을 만드는 것일까. 이는 인간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감정 없는 인간, 창조자로서의 힘에 대한 갈망을 마네킹을 통해 표출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병구는 인간과 같은 모습의 마네킹을 제작해낸다. 이는 외계인이 자신들과 똑같은 유전자 구조를 갖춘 지구인이란 실험 인간을 생성해낸 것과 비슷해 보인다.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은 창조주만이 할 수 있고, 이는 초월적인 힘을 상징한다. 즉 병구는 외계인과 같은 힘을 갈망함과 동시에 얻었고, 지하실에서 그 힘을 강만식에게 사용한다. (머리카락이 밀리고 나체가 된 강만식의 모습은 마네킹과 비슷하다)


위에서 언급했듯 지하실은 병구의 욕망이 표출되는 공간이다. 병구는 인간에게 받은 상처가 많았고, 그런 상처는 전부 인간의 감정적인 면에서 비롯되었다. 병구 자신조차도 감정적이라 쉽게 흥분하고 이성을 잃는다. 따라서 병구는 감정 없는 인간, 더 나아가 껍데기만 남은 인간을 제작하게 된다.


두 번째 직업인 양봉업자는 소외집단이 꿈꾸는 이상적인 태도를 상징한다. 양봉업자는 벌이라는 군집을 통제하고 밀랍과 꿀을 얻는다. 하지만 병구가 원하는 지배층의 모습은 통제와 이익만 취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양봉업자는 꿀벌을 말벌로부터 지켜야 한다.

 

즉 이 둘은 상호이익의 관계라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는 통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사회에 속한 집단이 원하는 것은 무력을 통한 억압과 한 쪽만 이익을 취하는 그들만의 리그는 아니라는 것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계,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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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환 감독이 병구가 쫓았던 외계인이 정말 실존하였단 것을 영화 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후반부에 강만식을 데려가기 위한 UFO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관객은 모든 것이 병구의 ‘환상’이라고 인지하며 그 속에서 계속해서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 장면이 진실인지 병구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환상인지 말이다.

 

병구는 필요에 의해 외계인과 실험이라는 환상적 소재를 자신의 현실로 이끌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여 환상적인 공간과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환상이라는 점을 배제하고 감독이 외계인 실존과 지구 멸망이라는 결말을 보여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환원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다.


앞서 말했듯 외계인-지구인 또한 지배관계에 놓여있다. 외계인은 언제든 지구를 폭파할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푸른 행성을 소유하기 위해 지구인이라는 실험체를 관찰한다. 이는 마치 병구의 가족이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듯하다.

 

결국 외계인은 지구를 폭파한다. 이는 더 이상의 희망이란 없는 지구와 인간에 대한 비관적인 결론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서 주된 배경음악이 ‘over the rainbow’인 것을 고려했을 때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극단적인 결말만은 아닐 것이다. ‘over the rainbow’의 가사는 비 너머의 세상, 이상 세계에 관한 희망을 담고 있다. 현재의 지구라는 행성은 이상적인 곳은 아님이 분명하다.


지구는 폭파하면서까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계이자, 되풀이되어선 안 되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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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병구를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 갔지만,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복수하는 인물로 관객의 엄청난 몰입을 유도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관객은 병구라는 인물에 은연중 거리감을 느끼며, 불공정한 사회를 살아온 것에 대해 동질감을 느끼지만, 자신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보는 듯할 수 있다.

 

이러한 타자화는 감독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비효과적으로 전달해 버리게 되는 오점이 생긴다. 그렇기에 감독은 조금이나마 관객과 병구의 거리를 가까이하기 위해 엔딩 크레딧을 활용하게 된다.


영화가 불행한 과거와 정신적 고통, 외계인에 대한 혼란이 휘몰아치는 메인 내러티브를 보여줬다면, 엔딩 크레딧에서는 순이와 병구가 처음 만나는 장면과 순이의 서커스 공연을 구경한 뒤 인형을 선물하는 병구의 행복하고 순수한 유아적 순간을 보여준다. 이때의 유아적 순간은 말 그대로 우리가 어릴 적 많은 것을 문제 삼거나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어떠한 불행도 사회적 질서도 생각나지 않는, 그 순간 자체로의 순수함을 담고 있다.


영화를 재차 보고 나니, 이렇게 병든 지구임에도 자신이 지켜내겠다 외치는 병구의 모습에 나는 작은 희망을 느낀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우리의 폭력적이고 순수한 영웅을 마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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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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