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느 예술가의 소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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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탐구에서 시작된다. 예술이 바라보는 대상 중 하나가 분명 인간이므로, 예술가가 인간에 몰입하는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몰입의 형태는 자주 기이하고 때때로 끔찍해서, 예술이 단지 욕망의 해방구로 변질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물론 예술이 욕망의 ‘아름다운’ 해방구로 승화되는 순간 의미가 있다). 몇 해 전,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 다수가 ‘예술가’의 범주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인간에 대한 예술적 탐구의 욕망이 예술가의 자격이 없는 이들에 의해 제멋대로 악용된 탓이다. 그렇게 예술이 흔들렸다. 예술의 세계가 거세게 흔들리면 온 세상은 그보다 크게 흔들린다.
예술에 대한 의심은 끝없이 생겨나고, 예술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악행은 반복된다. 그러나 인간은 예술을 놓을 수 없고 예술은 인간을 놓을 수 없으므로, 평화의 시대에도 예술은 반성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반성은 자신을 낮추어 돌이켜보는 일. 예술의 반성은 예술가의 지위에서 내려와 예술을 들여다보는 일에서 시작될 테다. 훌륭한 예술가임에도 현명한 관찰자의 관점을 가질 수 있는 것, 그것 또한 예술가의 덕목이다. 그런 소설가의 소설은 흔들리지 않는다.
전하영의 소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를 읽는다.
대학 연구소의 행정 계약직으로 일하는 ‘나’는 그곳에서 자신과 성향이 비슷해 보이는 유부남 연구자를 알게 되고 이내 은근한 호감을 느낀다. 나는 “재떨이가 비치된 가로등 아래”(10쪽)서 그와의 마주침을 은밀히 기다리지만, 동시에 그와 나 사이 엄연한 “신분 차이”(11쪽)를 실감하며 쓸쓸해한다. 나의 호감과 다르게 사람들 앞에서 나와의 관계를 단호하게 부정하던 그는 어느 날 나의 앞에서 중얼거린다. “스물한 살짜리를 유혹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에요.”(13쪽) 무심하게 내뱉는 그의 무례한 말은 나의 지난 대학시절 기억, 더 정확히는 “장 피에르에 관해서라면 시간을 많이 앞으로 돌”(16쪽)아가게 만든다.
“장 피에르 멜빌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들을 연상”(21쪽)시키는 코트를 입고 다녔기에 학생들에게 장 피에르라고 불렸던 남자는 ‘나’의 대학시절 교양강의 강사였다. 예술가적 용모와 분위기를 풍기던 그는 실제로 “그가 만든 작품”(20쪽)이 있는 듯 보이는 예술가였고, ‘권위’라는 말을 “그가 자신 있게 경멸할 수 있는 단어”(21쪽)로 보이게 할 만큼 순수한 면모로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정말 좋은 선생”(20쪽)이라고 믿었던 ‘나’ 역시도 그를 열렬히 따른다. 소설 속에서 그의 예술적 감성이 드러날수록, 우리는 현실에서 겪었던 사회적 진통을 떠올리며 일말의 의심을 드리우게 된다. 그런 의심은 소설 속 ‘나’가 “연수의 무릎과 허벅지 쪽에 손을 가져다대는”(25쪽) 장 피에르를 목격하면서 점점 짙어진다.
‘나’는 아름다운 외모와 “난해한 아름다움”(29쪽)을 모두 가진 단짝 연수를 “사랑하는 척”(26쪽)하며 동경하고, 동시에 질투를 느낀다. 학창시절 남성과의 교류가 부족했던 탓인지 남성 전체를 향해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나의 경계심과 경멸은 “투명한 인간 방패처럼 연수의 옆에 붙어”(25쪽) 연수를 독차지하는, 약간은 왜곡된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람과 사랑에 대해 미성숙했던 나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연수는 어느 날 나에게 “애인이 하나 있다”(27쪽)고 고백한다.
나는 아무 힘이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고 말했어. 그런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고귀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p.27
물론 장 피에르로 추측되는 ‘그 사람’은 연수의 무력함을 아름다움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녀를 기어이 그런 상태로 만들어낸다. 그건 얼핏 매혹적으로 보이지만 곰곰이 곱씹었을 때 “아주 꺼림칙한 일”(27쪽)이다. 예술적 창조의 행위가 아니라 대상이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버”(같은 쪽)리게 만드는 인간적 파괴의 행위인 것. 어떤 예술은 권위와 명망과 존경을 얻은 뒤 무책임하며 무자비한 탐욕의 모습으로 바꾼다. 흔들고 부수는 방식으로, ‘고귀하고 중요한’ 예술의 일이라고 자신을 포장하면서. (우리는 이제 그러한 행위에 ‘가스라이팅’이라는 이름을 붙여 단죄한다.) ‘나’는 연수의 사랑을 지켜보며 치기 어린 반감을 표출하는데, 장 피에르를 차지한 연수를 질투하면서도 끝끝내 사랑해 스스로 아파하는 ‘나’의 평범한 태도와 무기력한 독백이 오히려 진실한 예술에 가깝게 보인다.
미성숙하며 정신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지나며 연수는 예술의 몽환적 감각을 향해 도피했고, ‘나’는 현실적 감각을 매섭게 세우고 모든 것을 경계했다. 불안의 날들이었으므로 그녀들은 동시에 장 피에르를 사랑(혹은 동경)하고 만다. 이처럼 오류가 있는 사랑을 끝내 분별하지(혹은 막아내지) 못한 것은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는 사랑의 주체(연수)도, 사랑의 파수꾼(나)도, 원숙하고 의뭉스러운 예술가의 왜곡된 탐욕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테다. 그녀들은 “단지, 스무 살이었다. 유혹에 대한 면역이라곤 없”(46쪽)는.
나와 연수가 함께 간 파리 여행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진절머리가”(43쪽) 날 정도의 갈등을 맞이한다. 잦아진 연수의 단독 외출이 장 피에르와의 밀회를 위한 것임을 예감한 나는 일련의 “위기감”(42쪽)을 느끼며 분노하고 만 것. 연수의 연애에 대한 나의 예민한 반응은 스스로 유아적 “뚜비 이미지를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40쪽)이란 불안을 직면한 미성숙한 인물의 성장통인 동시에, 자신과 연수, 장 피에르 사이 안정적 관계가 무너질 것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됐을 테다. 정작 사랑에 빠진 연수도 “어느 날엔 행복해 보였고 또 어느 날에는 혼란스러워”(41쪽) 보이며 불안하게 흔들리는데, 이는 연수 역시 사랑으로 탐욕을 포장한 예술가의 굴레에 걸려든 미성숙한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장 피에르가 권위에 저항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권위 뒤에 숨어 “명확하게 추한 문제”(49쪽)를 연이어 일으킨 범죄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변질되고 고갈되어버린 것들”(53쪽)을 무던히 톺아볼 수 있게 될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자신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던 (“세상에, 너네가 같은 나이라니”) 장 피에르 앞에서 티셔츠 아래 아름다운 자신의 가슴을 “아무한테도 그것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처럼”(37쪽) 느끼며 부끄러워하던 나도, 한 차례 이혼을 겪고 솔직한 자신을 표현하는 “글쓰기를 해보려”(55쪽) 배움의 길에 들어선 연수도, “각자의 굴욕을 꿋꿋이 견디며 살아가고”(51쪽) 끝내 성장해 있다. 과거를 돌아보며 “진짜 별것도 아닌 게”(54쪽), 툭 한마디 내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우리의 미성숙함은 그 자체로 예술의 탈을 쓴 악마들의 욕망 대상이 될 만큼 충분히 아름답다. 미성숙함이 유약하게 흔들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미성숙함을 예술이라는 권위적 이름으로 붙잡고 흔드는 것은 분명한 죄다. 전하영의 소설은 권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평범한 시선으로 빚은 예술이다. 이 소설은 나와 연수의 삶을 빌려 이렇게 웅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술을 핑계로 타인을 무너뜨리는 삶보다 “여자 주인공의 특별함을 돋보이게끔 하기 위해 평범함의 기준처럼 제시되는 삶”(47쪽)이 분명히 낫다고. 질투와 사랑 사이에서 자기 자신만 아파하는 평범함이 오히려 진실한 예술이 될 거라고.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한 단계 높은 현란한 수준이 아니라 한 단계 깊은 평범한 차원의 소설이다. 이 소설이 2021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사실은 놀랍지 않다.
[차승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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