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의 존엄성

존엄성을 실감하며
글 입력 2023.12.03 12:2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231203014540_xoeaqwgm.jpg

 

 

존엄성 문제는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다. 존엄성이라는 단어 자체는 초등학교에서부터 흔히 듣는 말이지만 그걸 겪는다는 것, 그래서 정말로 알게 되는 건 좀 다른 이야기다. 우리가 알게 되기 전에도 이미 그러한 문제를 겪긴 하지만 ’이건 존엄성과 관련 있는 문제다‘라고 인식하는 순간 좀 더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다가온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우리를 강제하는 요소들, 신체나 환경에 반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즉, 화나 욕구를 참고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반면 동물은 의지가 없으므로 그런 것에 거스를 수 없다. 동물 자신이 하는 행동은 실질적으로 선택에 의한 행동이 아니다. 우리는 행위를 하는 동물을 어떤 한 주체자로서 인식하지만 사실 동물에게는 ‘자신‘이 없다. ‘동물 자신‘이란 말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주체자로서의 ’자신‘은 인간과 동물, 그밖에 모든 존재를 구분하는 척도임과 동시에 존엄성과 직결되는 요소다.

 

’우리 자신‘이란 것과 의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존엄성이 파괴되거나 실존이 위협받기도 한다. 빈곤과 기아가 위협적인 이유는 1차원 적인 고통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존엄성은 의지가 있는 인간만이 갖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존엄성을 파괴한다는 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위협한다는 것과 같다.

 

이런 위협들은 인간을 끌어내린다. 동물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 그러니까 먹이를 사냥 하거나 번식을 하거나 천적과 싸우는 등의 행동은 자의식의 선택에 따른 행동이 아닌 조건적인 행동이다. 인간도 조건과 환경에 따라 상응하는 행동을 요구 받지만, 그와 동시에 주체적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요구와 선택은 주체자가 ‘자신’을 만들어가는 핵심 요소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은 결정되고 정의된다. 구체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떠한 ‘자신’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스스로를 선택한다는 점이야말로 존엄성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을 끌어내리는 것들‘은 인간의 선택을 박탈시킨다고 할수도 있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쉽게 말 할 수 있다. 투쟁해라, 인내해라, 노력해라. 하지만 어떤 일은 존엄성을 가진 인간, 즉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지위를 끌어내려 마치 선택권 없는 동물처럼 만든다. 존엄성의 파괴라는 말을 다르게 말하면 ‘세상의 강요’, ‘부조리’이다. ‘하는 것’이 결여된 상태 말이다. 하루를 굶는다면 괜찮겠지만 보름을 굶주리고 한 달을 굶주리면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예시를 들자면 사회를 좀먹는 비리를 내부고발 할 것인가? 그것이 옳다는걸 알고 있지만 나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외면할 것인가? 그것이 옳고, 그렇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나에게는 손해만을 초래하므로 외면 할 것인가? 굶어 죽을지언정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에 있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로의 선택에 끊임없이 던져진다.

 

옳은 일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것이고 옳은 일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 반대로 이유없이 옳은 일을 저버리는 사람이 있을것이고 다른 환경이라면 옳은 일을 했을 사람이 무너지는 일도 있을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끝에 눈부신 결과를 이뤄낸 사람을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는 눈부신 결과 때문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해낸 의지 때문이다.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알고 있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말이다. 하지만 얼마나 하찮은 의지였던가. 예상 못 한 사소한 부조리에도 존엄성은 무너진다. 존재자로서, 인간으로서, 살아지는 사람이 아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지위는 아주 사소한 일로 위협받는다. ‘옳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며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선택한다‘라는 이 한 문장은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그걸 지니고 살아가기에 세상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한없이 즐겁고 아름답던 세상은 한순간에 두려움 가득한 곳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무엇이 옳은지 잘 판단하지 못할까 두렵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했음에도 그걸 행하지 못할까 더 두렵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나 자신이 나의 선택이 아닌 세상의 강요에 의한 선택을 하게 됐을 때,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 더 이상 존엄성도 없고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을 품으며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존엄성 없는 인간’임을 받아들이며 살아지는 데로 사는 건 그 무엇보다 간단하다. 하지만 그 순간 살아갈 가치는 사라진다. 떨어지는 빗물로 풍화되는 바위는 선택권이 없다. 존엄성 없는 인간은 바위와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흙이 되어 사라진들 상관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위협에 노출돼있는 인간이 언제나 완벽한 선택만 하며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삶은 고통이라는 말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에 있어 인간이 시간적인 존재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건과 선택,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은 딱딱 끊어지고 완결적인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들에 의해 삶이 완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현실을 연속적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택하는 존재보다도 의지를 갖는 존재에 부합한다. 우리는 기꺼이 산을 내려오는 죄인처럼 살아가야 한다. 평생을 나로서만 살아온 사람은 없고 나로서만 살아갈 사람도 없다. 매순간 나로서 살아가려는 사람만 있을 수 있다. 당연히 그렇게 사는것은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김윤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