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식이 없대도 감상은 자유니까!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11.1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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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을 표현하려 할 때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아는 것이 없다는 두려움’이다. ‘통시적 흐름 속에서 놓친 부분이 있을까’, ‘내 감상이 이미 진부해지지는 않았을까’라는 걱정은 내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려는 결심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항상 지식을 기반으로 작품을 깊이 있게 향유하려 노력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생각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자 했다. 하나의 작품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정보가 쌓이지 않았을 때는 글을 쓰지 않았을 뿐더러 입을 열지도 않았다.

 

지식이 쌓여야 깊은 통찰이 가능하다는 명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사실과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지식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자신의 감각만을 이용하여 작품을 즐기고 평가해보는 경험도 필요하다. 때로는 지식 없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승인 혜능(慧能, 638~713) 그리고 신수(神秀, 606~706)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단박의 깨달음 ‘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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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종의 6대조인 혜능은 선리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을 뿐더러 책을 읽어본 적도, 글을 쓸 줄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반면 신수는 젊었을 때부터 유가와 도가의 학설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고, 불교 경전 연구에도 몰두하여 학식과 인품이 뛰어났다. 때문에 신수는 이미 선종의 후계자로 공인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조 홍인은 신수가 아닌 혜능이 선종의 계보를 잇도록 결정하였다. 그 원인는 각자가 나타내고 있는 '깨달음'의 차이에 있었다. 14년을 줄곧 산 속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신수의 수행법은 열심히 수행하여 점차 깨달음을 얻어가는 ‘점오(漸悟)’의 깨달음이다.

 

반면 어떠한 기존 지식도 없이 <금강경>의 게송 한 구절을 듣고 바로 깨우친 혜능은 단박의 깨달음인 ‘돈오(頓悟)’의 깨달음을 보여준다. 홍인은 신수의 깨달음이 아닌 혜능의 깨달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육조 신수’가 아닌 ‘육조 혜능’을 기억하고 있다.

 

어떤 지식과 수양에 기반하지 않아도 단박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혜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물론 점진적인 깨달음이 전제해야 돈오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은 당연하다. 수행과 노력을 도외시 하겠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누구나 한 번쯤 단박의 깨달음의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꼭 신성하고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더라도 온전히 나만의 사유에서 비롯된 고유한 감상의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육조 혜능 대사의 이야기는 정해진 틀과 지식에 얽매여 나만의 자유로운 깨달음을 감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보게 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작품에 대한 정보나 전문가들의 말들이 개입되지 않았을 때 비로소 나만의 감상과 나만의 글이 나올 수 있었다. 평론가들의 의견을 정확히 ‘참고’만 하여 나의 글을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내가 스치고 간 단어와 문장들은 어떻게든 내 글에 묻히게 되기 때문이다.

 

대학교 과제로 소논문을 적는 일이 많았다. 전체 글 중에서 서론은 내가 특히 공들이는 부분이었다. 서론은 글의 시사점과 전반적인 내용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는 글이기에 언어력과 글을 구조화시키는 능력 그리고 한 방울의 문학성까지 전부 요구되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정신을 서론에 집중하여 완벽한 글을 쓰려 고군분투 했다.

 

하지만 선행 연구를 분석하며 여러 논문을 참고할 때 마다 내 서론이 조금씩 수정되었다. 비슷한 논조를 지닌 다른 논문들의 서론이 그럴듯 해 보였고 이런 감정이 내 서론에도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전문가들의 영향을 받아 변경된 나의 서론은 결국 중구난방이었다. 다른 사람의 문장을 따라 적으려 하니 내 글에 어우러지지 않고 튀는 문장들이 즐비하게 될 뿐이었다. 하지만 선행연구를 분석하며 주제에 대한 사유는 계속해서 깊어져 있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어떤 자료에도 기반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다시 서론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마음에 드는 서론이 완성되었다.

 

작품을 감상하고 글을 쓰는 일에는 때로는 지식과 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감상과 표현에 있어 정해진 형식과 절차, 그리고 당위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나는 지금까지 지식이 전제해야 한다는 당위를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세상의 눈에 맞추기 위해 감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모든 초점에 나에게 맞추어져도 된다. ‘영화를 보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시를 보는 내내 지루해서 집에 가고 싶었다.’ 등의 감상도 좋다.

 

아는 것이 없어도 상관 없다. 조금 더 자유롭게, 자신있게, 편안하게 감상해도 된다. 감상은 그래야 한다.

 

 

[임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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