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도서/문학]

글 입력 2023.10.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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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것만으로 자신의 삶이 지속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기억상실증 환자, 기 롤랑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기. 나는 그것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군요 ……”]


10년 전에 기 롤랑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고, 위트의 흥신소에 가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증거나 기억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위트 역시 과거에 기억상실증에 빠진 적이 있지만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주는 대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지금과 미래만을 생각하자며 그에게 기 롤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과 함께 일하게 한다.

 

이후 위트는 흥신소를 정리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고, 기 롤랑은 자신을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기 롤랑은 소나쉬체를 시작으로 그의 친구인 외르퇴르, 러시아 노인 스티오파 드 자고리에프, 피아노 연주자 왈도 불런트, 경마 기수 앙드레 빌드메르 등 자신과 깊은 관계였던 사람만이 아니라 스치듯이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까지 찾아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단서를 모으고, 자신을 확립해 나간다.


기 롤랑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은 건조해 보이지만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와 불현듯 스치는 냄새와 촉각에 관한 감각적 서술은 현재의 기억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기억의 저편에 놓여있는 그의 과거를 환기하기도 하며 실루엣에 색채를 더한다.


추적의 과정에서 기는 하워드 드 뤼즈이기도 했다가, 페드로 멕케부아로 존재하기도 한다. 이렇게 기는 자신의 삶을 찾는듯 하다가도 기는 타인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는 파편적인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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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 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 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프레디’라는 최후의 실마리를 놓친 기에게 남은 것은 로마에 존재하는 옛 주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뿐 이다. 기는 그곳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으면서 소설이 끝난다.


잃어버린 과거와 정체성을 탐색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추적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기의 정체성은 밝혀지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은 우리 역시 한낱 신기루처럼 무(無)의 상태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끝까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살아야 함을 함의하고 있는 것 같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의 에세이 『모든 사람은 혼자다』에서 언제나 과거를 지양하지만 나의 미래는 이 과거를 포함하며 결코 과거 없이는 미래를 구축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위트의 말처럼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장 우리 앞에 놓여진 것은 현재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거의 편린일지라도 그 시간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구축했다.

 

지금 역시 곧 과거가 된다.

 

타인이 아닌 나의 기억 속에서, 현재의 나는 어떤 과거의 집합일까.

 

 

[오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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