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라디오를 켜봐요 [문화 전반]

라디오도 할 수 있는 일, 라디오라서 할 수 있는 일
글 입력 2023.10.10 15: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유를 알 수 없이 찾아온 불면의 밤, 눅눅한 주황빛 등을 켜놓고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하릴없이 흰 벽을 바라보니 문득 몇 년 전 일이 생각이 난다.

 

갓 입학한 1학년의 순수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3학년만큼의 절실함은 아직 가지지 못한, 어디에도 제대로 낄 수 없는 깍두기 같았던 고등학교 2학년, 나의 열여덟. 그때 나는 오랫동안 좋아한 아티스트가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를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정규수업이 끝나면 모든 학생이 거의 의무적으로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라디오가 딱 그 시간에 맞춰 시작할 건 또 뭐람. 10시가 되면 신발장 앞에서 친구들과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고 10시 40분이면 집에 도착해서 씻고 있을 시간이니 라디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듣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뿐인 그 한 시간이 나에겐 너무 소중했다. 이어폰 줄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로, 그가 사랑하는 노래로 이 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낭만적인 시간이었으니까. 나는 라디오를 몇 분이라도 더 들으려고 빠른 걸음을 일부러 늦추기도 했고, 야자 3교시 도중에 학교를 빠져나와 조금 일찍 집에 간 적도 있다.

 


iphone-2618670_1920.jpg

 

 

그러는 동안 내가 보낸 사연은 몇 번이나 소개되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른한 디제이의 목소리가 익숙한 문장을 읊기 시작하면 심장이 마구 뛰었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채팅창에 따스한 메시지를 남겨주던 사람들은 친구처럼 느껴졌다. 겨울을 보내며 고3이 될 준비를 하는 나에게 디제이가 특별히 추천해주었던 그 노래는 날이 추워지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잊지 못할 선물이 되었다.

 

돌아보면 나의 사연에 담겨 있던 건 참 하찮고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한 토막일 뿐이었다. 누구나 다 겪는, 하나도 신선하지 않은 지루한 이야기. 하지만 그래서 누구의 사연도 될 수 있고, 누구나 자기만의 기억을 꺼내어 펼쳐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

 

라디오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간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개인적인 이야기가 전파를 타고 흘러서 얼마나 많은 '너'와 '나'가 서로 이름도, 생김새도 모르는 채로 ‘우리’가 되었는지를 생각한다. 라디오라는 매체의 열혈 팬은 아니지만 라디오의 매력은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것 같다.

 

 

IMG_4815.jpg

 

 

MBC 라디오의 장수연 PD는 라디오 프로듀서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에 이렇게 적었다.

 

 

라디오가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몇 명이나 들을까?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소리치고 있는 건 아닐까? (중략) 다시 한번 카페 벽의 낙서를 생각한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처럼, 머릿속 고민처럼, 책 속 문장처럼,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의 제목을 적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랬듯 누군가는 라디오가 주는 뭉근한 따뜻함에 기대 인생의 터널을 지난다. 세상에는 이런 매체도 필요할 것이다.

 

 

눈앞에 놓인 모의고사 문제집의 두께가 앞으로 버텨야 할 날들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독서실에서, 밤 10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어른들의 배려로 환하게 밝혀진 학교 옆 돌담길을 홀로 걸으며, 720원 청소년 요금을 내고 운이 좋으면 앉아 갈 수 있었던 차가운 하굣길의 버스 안에서 나는 그 라디오 속에 살았다. 길어야 30분이고 바쁘면 아예 듣지도 못하는 날이 허다했지만 그래도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던 순간만큼은 라디오가 내 세상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버텼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라디오의 낭만을 믿는다. 의사가 수술을 통해 당장 위급한 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것처럼 라디오가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는 드라마틱한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라디오가 마치 짝사랑을 하듯이 매일 한자리에서 조용히 지탱한 누군가의 하루는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인생이 된다.

 

그러니 하루를 살게 하는 것, 더 나아가 하루 안의 한순간을 살게 하는 라디오는 어쩌면 그동안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의 내일을 있게 한 생명의 은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라디오의 힘을 믿는다.

 

 

 

컬쳐리스트 태그.jpg

 

 

[윤채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