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열정과 열등감은 한 끗 차이 [영화]

글 입력 2023.09.1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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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열등감’의 사전적 정의는 각각 이러하다.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열정)’,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열등감)'. 여기서 주지할 것은 핵심어만 남기면 열정은 결국 마음이고, 열등감은 감정이라는 것이다.

 

마음과 감정은 이음동의어처럼 보이지만, 사전을 통해 상세한 함의를 들여다보면 작용 방향이 묘하게 상반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음'은 주체가 본래 지닌 성격이나 품성 혹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관심, 사고력, 판단력 등의 의미가 있다. 반면, '감정'은 외부의 현상과 사건에 대한 수동적 반응에 가깝다.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상당한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 '마음'이 '감정'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열렬한 애정을 바탕으로 열중하고자 하는 주체적 노력'이 '외부의 자극에 의해 스스로를 모나고 무능력한 존재로 폄하하는 수동적 상태'로 뒤바뀌는 낙차가 찰나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열정을 도난당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엔 열등감이 들어선다. 과연 지구력이 약해서일 뿐일까?

 

적자생존이 고질화된 오늘날엔 그 속도는 더 단축되고 빈도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다.  내 가능성과 역량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우리는 수없이 저울에 올려진다. 제법 엇비슷한 상대를 만난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 필사를 다해보겠지만, 애초에 체급 자체가 월등한 초강수와 맞붙게 된다면 혹은 맞설 기회조차 박탈당한다면 열정은 팍 식기 마련이다.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은 그 찰나의 낙차와 연관되어 있다.

 

 

[크기변환][포맷변환]급처합니다...-네고-불가_스틸5.jpg

 

 

단편 영화 ‘급처합니다...네고 불가’는 그중 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도로 한복판에서 형형 색색의 기타 다섯 개를 들고 서성이는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강달'. 곧이어 붉은 승용차 한 대가 그 앞에 정차하고, 한눈에 보아도 개성이 뚜렷한 복장과 스타일의 다른 남성이 내려 다가온다. 나누는 대화들로 보아 그들은 중고 기타 직거래 중인 듯하다. 둘은 공백을 채우려 스몰 토크를 시도하는데, 알고 보니 구매자는 최근 인디 음악계에서 핫한 '박강'이다.

 

강달이 기타를 건네주며 자신이 10여 년 동안 걸어온 뮤지션의 길을 왜 포기하게 되었는지 머쓱하게 답변할 동안 박강은 기타를 받으며 단기간에 주목받은 인디 가수로의 커리어 하이와 비전에 대해 당찬 열변을 펼친다.

 

처음엔 팬심에 반가웠지만, 본인보다 어린 나이에 단기간에 성공한 데다 고학력자에 집도, 차도 있는 박강의 겸연쩍은 자랑에 강달은 점점 쪼그라든다.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한 강달은 죄는 없지만 동시에 또 재수도 없는 강달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재차 확인하며 소심하게 분노를 터뜨린다.

 

극의 주동인물은 명확하다. 강달. 두 명의 남성이 등장하고,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프레임과 분량을 차지하지만 우리가 이입하는 대상은 박강이 아니다. 그 까닭은 보통의 소시민들이라면 비교에 있어 우위보다는 열위에 놓인 적이 훨씬 다분할 것이고, 그러한 축적된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극의 몰입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멀리 내다보지 않아도 매일 수 백 번 접속하는 인스타그램만 해도 우리는 5분에 몇십 번씩 열등감에 쉬이 위축되지 않는가.


 

[크기변환][포맷변환]영화 귀마개 스틸.jpg

 

 

한편, ‘세대교체’를 소재로 열정이 전이되는 순간을 묵직하게 포착한 단편작 ‘귀마개’도 눈여겨볼 만하다. 굴삭기 기사 ‘양희’는 난청을 원인으로 퇴직을 종용 받고 있다. 사직서를 제출하거나, 회사의 권고에 응하거나 어찌 됐건 비자발적으로 퇴사해야 하는 상황이 양희는 달갑지 않다.

 

그러나 허한 마음을 달래기도 잠시 그는 당장 신입 ‘호영’에게 인수인계를 해야 한다. 싹싹한 부사수 호영은 양희를 진심으로 존대하고, 그의 송별회까지 준비한다. 양희는 호영의 성의가 고마우면서도 일할 수 있는 호영이 부러운,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더 이상 귀마개를 쓸 명분이 없어진 양희는 호영에게 귀마개를 양도한다.

 

전자에 비해 비교적 흔히 다뤄지지 않은 생소한 관점에서 진행되는 서사다. 보통 우리가 여타 매체에서 목격해왔고 통감해 온 것은 동세대 간 각자도생이었다. 영화는 그 못지않은 치열한 전장에 놓인 기성세대를 주목한다. 정년 은퇴는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주인공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일터에서 자진해서 물러나는 것과 더 몸담고 싶지만 노화로 생산력과 노동력이 감소했다는 이유로 강제 퇴출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감흥을 남기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노래방 안에서 음주 가무를 만끽할 동안 홀로 사색에 잠겨있는 양희의 얼굴이 이를 대변한다.

 

두 영화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건네주거나 받는다는 점에서 거래 관계에 놓여 있다. 강달은 박강에게 기타를 건네고, 양희는 호영에게 귀마개를 건넨다. 기타와 귀마개는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 무용한 것들이지만, 그 누구도 원하는 거래는 아니었을 것이다.

 

강달이 결국 뮤지션으로 빛을 보았다면, 양희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었다면 그 거래는 애초에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각자도생의 세태를 비판한다거나 노인 노동권 보장을 주창하려는 선전 영화는 아니다.

 

그저 이 두 작품은 현실이라는 각개전투에서 열정을 도난 당한 패잔병들의 열패, 당혹, 수치를 담담히 관조할 뿐이다.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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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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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도훈
    • 안녕하세요. 귀마개를 연출한 박도훈입니다. 에디터님께서 작성해 주신 글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보았습니다. 좋게 관람해 주시고 리뷰를 작성해 주셔서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작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찌보면 '케스트 어웨이'의 윌슨과 대화하는 것처럼 외롭기도 한 일인 거 같습니다. 그 때문에 영화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는데요. 좋은 피드백을 얻어가는 거 같아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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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민서
    • 안녕하세요 :) 얼마 전 단편영화제에서 접하고 오래도록 기억이 남았던 작품입니다. 부족한 필력으로 적은 감상평인데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에디터 활동 시작한 이후 처음 달린 댓글인지라 여러모로 뜻깊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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