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을의 마음

되돌릴 순 없어도 다시 시작할 순 있으니까
글 입력 2023.09.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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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때도 없이 귀청을 울려대던 우렁찬 매미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고 풀벌레의 고요한 속삭임이 시원한 밤공기를 가득 채울 때, 가을만 되면 수없이 반복해서 듣던 그 노래를 무심결에 흥얼거리고 있을 때, 나는 가을이 왔음을 직감한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이 수십 번의 낮과 밤이 지났고 어느새 여기, 여름의 끝자락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 낮 기온은 여전히 30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풀벌레 소리도 듣고 나만의 가을 노래도 떠올렸으니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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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면 벌써 한 해가 다 간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9월이면 일 년을 네 분기로 나누었을 때 고작 한 분기만을 남겨두고 있는 셈이다.

 

올해는 또 어떤 이야기로 이 기나긴 한 해를 채워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연초와는 다르게 이 시기가 되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대하게 된다. 앞으로 갈 길보다 이미 지나온 길이 더 길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랄까.

 

하지만 절대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던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하염없이 걷고 또 걷다가 저 멀리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발걸음이 홀가분하기만 하면 좋으련만, 지나온 날만큼 마음속에 수북이 쌓여버린 후회가 어느새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누른다.

 

지키지 못한 약속, 관계의 끝을 직감하고 그 먼 길을 홀로 걸었던 밤, 용기가 없어서 반가운 얼굴에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조용히 되돌아선 날, 부족한 나의 마음으로 상처받은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일, 그깟 벽 하나를 허물지 못해 결국 영영 놓치고 말았던 끈.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넘긴 지 한참이 된 일기장의 첫 장으로 돌아가 조용히 묻어 두었던 사연을 전부 파헤친다. 한때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르는데, 전하지 못한 수백 개의 한마디를 가슴에 품고 사는 나는 그걸 쉽게 지워내지 못한다. 한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다는 시간의 특성 앞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연약한 어린아이가 된다.

 

가을이 되면 괜히 이런저런 변화를 시도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가 보다. 눈처럼 불어난 후회가 나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지난날은 깨끗이 잊고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 그래서 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은 아쉬웠던 지난날을 만회할 수 있도록 신이 내게 준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번 가을에는 너무 오랫동안 바꾸지 않아 질려버린 긴 웨이브 머리를 마구 볶았다. 누군가를 책임지고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그동안 도전하지 못했던 인생 첫 과외도 시작했고, 바빠서 그냥 쌓아두기만 했던 책들도 한 권씩 읽기 시작했으며, 몇 년 동안 잊고 살았던 친구의 연락처를 찾아 문자도 한 통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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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머리가 너무 복잡한 나머지 한밤중에 일어나 방을 정리했다. 햇빛을 받아 색이 바랜 창가의 책들을 책장에 가지런히 꽂고, 사용하지 않는 몇 가지 물건들을 상자에 집어넣었다. 필요 없는 줄도 모르고 매일같이 서랍장에 찔러 넣어둔 영수증과 메모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대충 넣어서 마구 구겨진 티셔츠도 꺼내어 다시 접었다.

 

청소가 끝난 후 서랍과 옷장에는 질서가 생기고 공간이 넉넉해졌으나 외관상으로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내 방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서랍에 몽땅 던져 넣는다고 해서 방이 실제로 깨끗해지는 것은 아닌데, 나는 그동안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너무나 많은 것들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살았구나.


가을이다. 푸르던 나뭇잎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가고 한없이 뜨거웠던 바람의 숨결이 선선해지는 가을이 왔다. 세상도 길었던 여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듯 나도 지나간 시간의 아쉬움에 묶인 발을 풀고 내 앞에 남겨진 길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한다.

 

미련 없이 웃을 수 있는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싶다. 그렇게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2023년의 끝을 무사히 통과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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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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