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 모든 사라지는 것들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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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리 비가 내렸다. 나는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다양한 시집이 생각나는데, 이를테면 눈이 오는 날에는 이규리의 『당신은 첫눈입니까』, 하늘이 맑고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면 민구의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와 권누리의 『한여름 손잡기』가 떠오른다.
요즘같이 비가 내리는 날에는 신용목의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를 꼭 읽어줘야 한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나와 함께 시집에 축축하게 물들어 보았으면 한다.
이별은 사라지는 것
신용목의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에는 모든 시를 통괄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바로 ‘비’이다. 비는 어떤 존재일까. ‘비’하면 습하고, 축축하고, 젖었을 때 찝찝한 느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에게는 비가 다소 불쾌한 존재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시인의 말에서 언급된 비를 마주하고 나서부터는 비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느껴진다.
비는 떨어질 때만 존재한다.
「시인의 말」 중
신용목은 비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점에 주목한 게 아니라 비의 존재 자체에 집중한다. 그건 인간이라는 한정적이고 편파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비를 내리는 구름이 되어보고, 비를 맞는 땅이 되어보아야 가능한 일이다.
신용목 시인은 친숙한 언어와 표현으로 시를 이끌어간다. 볼펜, 초인종, 상자, 우산, 분리수거, 주전자와 같은 익숙한 사물이 등장하고, 그것들을 통해 일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깊숙하게 파고든다.
그중에서도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한다. 떨어질 때만 존재하고, 땅에 닿으면 그 형체를 잃고 마는 비처럼. 따스한 햇살 아래 홀로 죽어가는 눈사람처럼. 존재의 잠시를 조금 더 길게 지속하기 위해 그는 시를 쓴다. 사라짐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과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자 하는 애씀이 여기 그득하다. 살면서 망각하고 있는 부분을 날카롭게 짚어내지만, 독자에게 이를 알려줄 때는 무딘 칼처럼 뭉툭하고 부드럽게 다가온다. 따라서 시인의 생각이 강요된다는 느낌 없이 비처럼 촉촉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잠수를 배운다. 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바닥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
물에게 목을 축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호흡으로 하늘의 허파를 계속 부풀리듯이
구름의 자세를 추측하며
비행을 배운다.
불쑥불쑥 그날의 내가 나타나.
비 오던 날
파란 신호등이 횡단보도를 밟으며 점멸하던 날, 섬에 거대한 활주로를 보면
배를 가르고 바퀴가 튀어나오지.
그날,
물이 하늘을 날아보려고 구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잠기고픈 구름이 비라는 이름을 가진다는 걸 알아버려서
나는 이름을 바꾸었다.
다른 곳으로 가보려고.
이곳의 비가 저곳의 눈인 것처럼, 구름이라고 하면 물은 하늘에서 사라진다.
비라고 하면 물은 빗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눈이라고 하면 비는 겨울 속으로
사라지고,
다른 곳으로 가면 다른 곳은 사라지겠지. 이름을 부르면 나는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지고 나면 어떤 이름으로 잊혀져도 좋은데,
공중의 활주로
물속의 바퀴로
불쑥불쑥 뛰어드는 그날의 나 때문에 일기를 쓰면 편지가 된다. 반성이 있는 편지와 추신이 있는 일기가 된다. 헤어지자고 말하고 나서는 보고 싶다고 말한다.
「슈게이징」 전문
위 시에서 눈에 들어온 표현은 “물에게 목을 축여주기 위해서”이다. 화자는 잠수를 배워 바다에 우물을 파고자 한다. 이미 물로 그득한 바다에 티끌의 물을 더하기 위해서이다. 그 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다를 위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물을 머금고 있는 건 바다일 텐데 말이다. 이처럼 신용목은 당연한 것을 뒤집어 낯설게 선보인다.
돌 속에는 돌이 있고 그 속엔 또 돌이 있다는 이야기 같다 중얼거리는 것이 꼭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일 같다, 속삭이는 일이 돌에게서 돌을 벗겨주고 물에게서 물을 말려주는 일 같다
「오르골」 부분
이를테면 「오르골」에 등장하는 “돌에게서 돌을 벗겨주고 물에게서 물을 말려주는 일인 것 같다”라는 표현 또한 마찬가지이다. 속까지 돌로 꽉 찬 돌을 벗겨주거나 물로만 이루어진 물을 말려준다는 발상은 익숙한 대상을 반전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더욱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어떤 경험을 한 후에 이 시를 썼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마 ‘이별’인 듯하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불쑥불쑥 그날의 내가 나타나”서 그날의 기억을 늘어놓는다. “일기를 쓰면 편지가" 되어서 오롯한 일기를 쓸 수도 없다. 헤어지자는 말을 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보고 싶다는 추신이 들어간 일기도 편지도 아닌 글을 쓰게 된다.
시인은 상대가 사라지는 이별을 말하기 위해 사라지는 것들을 데려온다. “물이 하늘을 날아보려고 구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거나,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잠기고픈 구름이 비라는 이름을 가지”듯 시인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이름을 바꾼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가면 분명 사라지는 것이 있다. “구름이라고 하면 물은 하늘에서”, “눈이라고 하면 비는 겨울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시인도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그 이름마저 잊힌다.
연쇄적인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자신을 세상에서 지운다. 마치 자신이 뱉은 이별의 말 때문에 사라진 상대처럼 말이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이 이별을 겪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시를 다시 읽으니 상실에 대한 슬픔이 확연하게 보였다. 더는 그 무엇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시인은 우물을 파고 호흡하고 비행한다. 바다와 하늘, 구름이 사라지지 않게끔 그것들을 지켜낸다.
시의 제목이 「슈게이징」이다. ‘슈게이징’은 직역하면 ‘구두를 본다’라는 의미인데, 인디 록의 한 음악 장르로서 자기 신발만 보고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모습에서 착안한 단어이다. 신발만 바라보던 이들이 고개를 들어 사라지는 것들에게 시선을 주었으면 하는 시인의 바람이 담긴 제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라지는 것 또한 사라지고
「슈게이징」은 사라지는 것들을 멀리서 지켜만 보는 느낌이었다면, 「생활사」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시인의 주목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지금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물 끓는 소리에 피어나는 물방울처럼
창문 너머 공터에는 단독 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책장으로 가 시집을 펼치고 ‘라일락’이라는 글자 속에서 라일락 향기를 찾는다
지금 사라지는 것이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사랑해요, 고백은 영원히 죽지 않아서 사람이라는 숙주를 갈아타고 갈아타고
사랑해요, 지금쯤 저 배우는 퇴근했겠지
고백으로부터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수없이 지나간 일요일이 덩그렇게 남겨놓은 오후
아파트에 살면서 갖다 놓은 화분
17층 공중의 작은 땅
달
나는 먹구름으로 다가가 비를 뿌린다 나의 블랙홀, 아파트가 끝나는 자리
대출 상환이 끝나는 자리
생활이 끝나는 자리
지금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있다 010번 마을버스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
0으로 시작하는 것에는 지워지는 말이 있다
“동식이 기억나?”
사진을 들이밀며
“얘잖아!”
왜 모두들 동그란 얼굴을 가졌을까
어느 날 다 잊겠다는 메일을 받았다 달이 밤을 끓이고 있었다 얼마나 휘저었으면 그 많은 집들이 저 어둠
곤죽 속으로 사라졌을까,
네 목소리가
내 얕은 머릿속에 어둠을 한 사발 덜어서는 후후 불며 밤새 퍼먹고 있다
「생활사」 전문
“지금 여기 사라지는 것이 있다”라고 명확하게 짚어준다. “단독 주택이 들어서”면서 점차 공터가 사라지는 바람에 풀밭이 아닌 ”글자 속에서 라일락 향기를 찾아야” 한다. 드라마에서 사랑을 고백한 배우는 이미 고백에서 퇴근했고, “0으로 시작하는 것에는 지워지는 말이 있어”서 010번 마을버스는 십 번 버스라고 불린다. “모두들 동그란 얼굴을 가진” 탓에 이름은 그 영향력을 잃는다.
그러나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지기만 할까. 시인은 “어느 날 다 잊겠다는 메일”을 받는다. 메일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잊는다’라는 건 당사자의 세상 속에서 그것이 영영 사라진다는 뜻을 내포한다. 시인은 사라지는 것을 지키려 하는 사람이다. 상실에 아파하며 사라지는 것이 조금이라도 오래 존재할 수 있도록 애쓴다.
1연부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시인의 애씀을 발견할 수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는 고백에서 퇴근했지만, 고백은 “사람이라는 숙주를 갈아타서” 또 다른 배우가 사랑 고백을 하고 있을 것이다. “수없이 지나간 일요일”은 어김없이 찾아와서 덩그러니 여유로운 오후를 두고 가고, 공터는 사라져 가지만 “17층 공중의 작은 땅”에 놓인 화분에는 식물이 자라난다.
어쩌면 「생활사」는 다 잊겠다는 메일을 보낸 이를 위한 위로의 시인 것 같다. 당신의 잊음처럼 많은 것들이 지금 여기서 사라지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이야기해주는 옅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한편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에서는 유독 끓고 끓이는 행위가 자주 등장한다.
난로를 켜고,
주전자에 받아 물을 올리고 조용히 구름을 만든다. 오늘은 흐름. 아니 비. 이렇게 불을 지피면 물속에 잠길 수도 있다. 물이 끓으면, 불 속을 헤엄칠 수도 있다.
불을 끄면.
창밖으로 검은 돌고래떼가 느리게 지나가는
밤.
무엇일까?
어떤 이별도 남아 있지 않은 인연에게 남은 것은.
밤은 모든 거리를 지우고 모든 벽을 허물고 사람 옆에 사람을 눕혀 오로지 꿈속의 얼굴만 보여주는데.
물속에서 빗방울을 건져내기 위해서 끓고 있는 주전자처럼
누가 운다.
주전자를 새까맣게 태우며 오는
비.
「구름 제조법」 부분
가령 「구름 제조법」은 화자가 “주전자에 물을 받아 올리고” 이를 끓여서 “조용히 구름을 만든다.” 그래서 비가 “주전자를 새까맣게 태우며 온다”고 한다. 그의 말 대로라면 비는 그저 고여있다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끓이는 행위를 통해 태어난다. 주전자로 물을 끓이는 과정을 거치며 비의 존재감에 중요성이 더해진다. 정성을 다해 끓여서 만들어진 것이 비이므로 형체는 금방 사라질지언정 그 존재까지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밤과 어둠 또한 마찬가지이다. 밤은 해가 뜨고 아침이 오면 사라진다. 그래서 달은 밤을 끓인다. 비록 “그 많은 집들이 저 어둠 곤죽 속으로 사라진다”고 해도 곧 사라질 어둠을 위해서 달이 밤을 끓인다. “네 목소리가 내 얕은 머릿속에 어둠을 한 사발 덜어서는 후후 불며 밤새 퍼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시인은 끓이는 행위가 사라지는 것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 끓는 소리에 피어나는 물방울처럼” 끓이는 것이란 많은 것을 피어오르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를 읽은 후 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한 여름날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어떤 이. 속수무책으로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을 손바닥으로 가려 햇빛을 막아주고, 서둘러 나무 밑으로 피한다. 결국 녹아 사라질 아이스크림이지만, 조금 더 아이스크림인 채로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이 이미지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나에게 불어온다. 그래서 시인과 같은 바람을 가지게 된다. 모든 것이 조금 더 느리게 사라졌으면 하는 쓰린 희망을 품게 된다.
나는 제시간에 오는 사람일까. 확실한 건 그의 시집을 통해 비로소 비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를 보면 하나 더 알게 된다.
「시인의 말」 중
비를 통해 영원히 모를 뻔한 그 하나를 알게 해준 시인에게 감사 인사를 보낸다.
[변정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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