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에도 레시피가 있다면 [영화]

글 입력 2023.08.03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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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름을 극히 싫어한다. 장마철이면 진득한 공기와 억센 비가, 이후부터는 매년 유례없는 무더위와 활개 치는 벌레들이 불쾌감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원래도 기질적으로 예민한 편인 나는 이맘때만 되면 유독 더 관대함을 잃는다. 매미의 우렁찬 울음과 새들의 불규칙한 지저귐, 뜀박질 치며 웃고 떠드는 아이들, 거센 빗줄기 등 어쩌면 당연한 여름의 소음들마저 거슬려 하면서.


이번 여름도 그랬다. 부쩍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속으로 채근하며 가을이 속히 오기를 부단히 바랐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던 차에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던 어느 날, 무더위를 환기해 보고자 다른 계절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찾게 되었고, 평소 애호하던 ‘키키 키린’ 주연의 작품을 발견해 지체 없이 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와 나의 조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여름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택한 영화로부터 여름을 생각하게 될 줄은.

 

극 중 주인공은 도라야끼를 파는 소규모 제과점의 사장 ‘센타로’다. 매일 기계적으로 반죽을 하고, 빵을 굽고, 영업용 팥소를 얹어 단팥빵을 만드는 그의 일상은 상당히 적막하다. 무심한 엄마와 살며 매 끼니를 혼자 해결해야 해 자주 가게에 들러 망한 도라야끼를 포장해가는 단골 소녀 ‘와카나’ 정도가 거의 유일한 대화 상대다.

 

그렇게 앙꼬 없는 빵 같이 살던 어느 날, 일흔이 훌쩍 넘은 할머니 ‘도쿠에’가 가게를 찾아와 아르바이트를 지원하고, 자신이 만든 팥소를 건네며 설득하자 센타로는 팥소 제작을 부탁하며 그녀를 고용한다. 첫 출근 날, 센타로는 단순한 정성 이상의 경외심을 담아 팥소를 만드는 도쿠에를 신이하게 여기지만, 마음이 깃든 팥소 덕에 깊은 풍미를 얻은 도리야끼처럼, 점차 여유를 되찾아가는 스스로를 감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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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에의 비결로 가게에 한동안 호황이 일기도 잠시, 그녀의 과거 한센병 병력이 소문을 타고 마을에 퍼지자 가게는 한동안 침체되고, 결국 다시 센타로만 남게 된다. 도쿠에를 보호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에 휘청이던 센타로는 글을 통해 의도치 않은 실수로 인해 내내 고립되어 살아온 내력을 고백하지만, 도쿠에가 곧 세상을 뜨면서 결국 편지는 부치지 못한다.

 

그러나 타계 직전 그녀가 남긴 카세트테이프가 센타로와 와카나에게 전해지고, 도쿠에는 음성으로 처음 본 순간부터 센타로의 공허한 눈을 읽었다며 방황하고 있을 그를 위해 애정과 삶의 지혜가 담긴 이야기들을 담담히 선사한다. 그녀의 유언에 감화된 센타로는 도쿠에가 가장 좋아하던 벚꽃나무 옆에서 도라야끼 장사를 재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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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로부터 내내 이해받지 못한 채 일평생을 소외자로 살아야 했던 도쿠에는 인간으로부터 이해받을 수 없었던 세상 만물들의 이야기에 이입하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를테면 팥소를 끓일 때는 팥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의 여정을 되새기며 감사를 표하고,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릴 때면 나무가 인사를 건네는 것이라며 이에 응하고자 반갑게 손을 흔든다. 또 관상용으로 케이지에 갇힌 새의 울음소리에서는 자유를 향한 염원을 읽고 과감히 방생시키기도 한다.


이는 자연친화적이라거나 탈인간중심주의적인 화술 이상의 것이다. 그 모든 이해의 대상에 인간 역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혹은 보고 듣고서도 하찮게 여겼던) 미물의 소리를 경청하고 의미를 아로새기고 소중히 하는 마음은 곧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당연히 여겨왔던 나 자신을 비로소 돌보고 존재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게 한다. 나뭇잎에 손을 흔들던 도쿠에를 엉뚱하게 바라봤던 센타로가 종국에는 벚꽃 나무를 버팀목 삼아 심연 속 동굴에서 탈출해 삶을 개척해 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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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혹은 존재의 소중함에 대해 피력하는 작품들을 많이 만나왔지만 유독 이 서사에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그 화자가 ‘도쿠에’이기 때문이다. 나병 진단으로 가족과 사회로부터 온전히 격리된 채, 일평생을 고립과 제한 속에 살아왔던, 몸도 마음도 부서졌던 사람. 미워할 것투성이인 비정한 세상이지만 그녀는 그런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만지고 들여다보며 삶을 긍정하는 힘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것이 곧 그녀의 인생 레시피라고 생각한다. 이때 ‘레시피’는 지침서라기보다는 비결 정도에 가깝다.

 

지대한 변화를 이루지는 못할 수도 있겠지만, 삶을 더 풍요롭게 가꾸어 주는 비결. 겉보기엔 평범하거나 혹은 모난 도라야끼더라도 정성이 깃든 팥소를 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품격 있는 요리가 되는 것처럼.


키키 키린, 그녀가 선물한 레시피 덕택에 이번 여름이 좀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한때는 미워했던 소리들인데 각자의 생을 부단히 살아내느라 뱉었던 것이라 생각하니 얕은 반성도 든다. 나 역시 망각의 동물인 인간인지라 이 효력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으나 당분간은 이 다정한 온기에 기대 새롭게 다가온 여름의 풍경들을 반겨보고 싶다.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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