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이너 히어로 [도서/문학]

[재인, 재욱, 재훈], 정세랑
글 입력 2023.07.2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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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따뜻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뉴스를 틀면 자신을 희생하여 누군가를 살린 사람의 이야기와 이유도 없이 타인을 죽인 이야기가 동시에 보도된다. 소설과 영화에나 존재할 것만 같던 일들이 현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세상은 참혹할 정도로 폭력적인 곳이지만 오늘 내가 울며 기댄 어깨는 친절하고, 어딘가엔 이런 사람들이 더 있겠지. 좋은 사람들에 대해 써야지. 그러면 세상엔 그런 면이 미미하게라도 반영되지 않을까, 하고요."

 

<릿터> 16호 105p 중 정세랑의 문장

 

 

정세랑 작가는 참혹한 세상을 피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리고 아주 보통의 히어로들을 그려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바람을 일삼는 부모가, 데이트 폭력을 하는 연인이,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 『재인, 재욱, 재훈』 속 히어로들은 '슈퍼'는 아니지만, 오히려 '마이너'하지만 일상의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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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초능력


   

재인, 재욱, 재훈은 삼 남매이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중, 세계 각 곳에 떨어져 있는 남매에게 각 'Save 1, Save 2, Save 3'라는 쪽지와 함께 재인에게는 손톱깎이, 재욱에게는 레이저 포인터, 그리고 재훈에게는 엘리베이터 열쇠가 택배로 도착한다.

 

자꾸만 길게 자라나는 재인의 손톱은 택배로 받은 손톱깎이로만 자를 수 있다. 이상함을 느낀 재인은 일하고 있는 연구원 내 1인 프로젝트 연구를 신청하고 자신의 손톱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손톱이 식물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 재인의 손톱은 배양도 가능한 것일까?

 

아랍의 R 공단에 파견을 나가 있는 재욱은 트러블 감지기가 내장된 눈을 갖게 되어 잘못된 시공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은 그 필요를 알 수 없는 레이저 포인터를 밤마다 광활한 하늘에 쏜다. 그 빛이 마치 동방박사가 본 별처럼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재훈은 8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 13층에 살아 학교에 지각하기를 일삼는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엘리베이터는 재훈에게 맞추어 움직인다. 재욱이 엘리베이터에 타면 재욱이 가는 층 외에는 멈추지도 않는다. 사소했던 행복도 잠시 재욱은 엄마의 등쌀에 밀려 엘리베이터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조지아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된다.

 

'과연 이게 쓸모가 있을까?' 의구심을 가진 채 살아가던 중 세 남매가 구해야 할 사건들이 펼쳐진다.

 

 

 

우리의 히어로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직도 세계의 극히 일부인 것 같아. 히어로까지는 아니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재인, 재욱, 재훈』 p.163

 

 

히어로는 현실의 문제를 보통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해결해 주는 존재이다. 대개 히어로의 위대함은 사건의 잔혹성과 비례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히어로 물을 보는 우리는 '저건 허구에서나 존재하는 일이니까.'라고 생각하며 안도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폭력들에도 히어로가 필요하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주로 다수의 문제를 한 명의 히어로가 해결한다. 그리고 어쩌면 한 명의 히어로가 다수를 구하는 서사가 더 '영웅답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단 한 명의 히어로보다 다수의 마이너 히어로들이 필요하다.

 

 

재인이와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짝이었다. 재인이의 출석번호는 33번, 나는 34번이었기 때문이다. 가나다순의 출석번호 같이 대수롭지 않은 우연이 한 사람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구 하나를 그토록 아무렇지 않은 방식으로 얻었다. 아무 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재인, 재욱, 재훈』 p.167 작가의 말 중

 

 

이 이야기는 작가의 말까지 읽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정세랑 작가와 재인과의 인연이 출석번호 앞뒤라는 대수롭지 않은 관계에서 시작되어 친구로 이어진 것처럼 우리의 안온한 일상도 별것 아닌 일에서부터 만들어질 거라는 것까지가 이 이야기가 독자에게 건네는 단단한 믿음이다. 우리 곁엔 히어로가 있고, 우리 또한 히어로가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를 폭력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우리일 것이라는 상투적이지만, 보편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작가는 특유의 톡톡 튀는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문체로 소설에 담았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내가 믿어오던 것과 다르다고 느낄 때, 자꾸만 비겁해지려고 할 때, 이 책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오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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