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언제까지 이럴 건데

글 입력 2023.07.2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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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적휘적.

 

기어코 내 시선을 끌고 말겠다는 손짓이 읽고 있던 책보다 내 얼굴과 더 가까워졌다.

 

안 앉으세요?

 

기어코 내 의사를 묻고야 마는 친절이었다. 이상한 사람이겠거니 무시하려던 나는 삽시간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고.

 

머춤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눈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친절을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낯선 상황이었다. 경험의 빈도를 묻는다면 손가락에 꼽을 것이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아 애써 숨겼다. 내 속을 드러내는 것이 나는 항상 민망하다. 특히 이런 때는 더 그렇다. 사실 웃음도 헤프고 눈물도 헤픈데. 들고 있던 책의 높이를 조절해 슬쩍 얼굴을 가렸다.

 

종로3가역에서의 환승이란 정말 최악이다. 5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려 걷다 보면 세상의 끝에서 끝까지 향하는 기분이 든다. 요즘 출퇴근만 해도 7,000보는 거뜬히 넘는 데에는 아마 환승이 가장 큰 몫을 할 테다. 그래도 많이 걸으면 좋으니, 하며 좋은 게 좋은 거지 생각한다. 퇴근길은 항상 북적이고 사방으로 온갖 박자가 가득하다.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보세 옷 가게의 큰 음악 소리, 크림빵을 할인한다는 사장님의 목소리, 타인을 앞지르려는 사람들의 빠른 걸음, 항상 말없이 구운 계란 3개를 2,000원에 판매하는 작은 가게의 침묵, 빠르게 걷다 보면 꼭 마주치는 느린 걸음의 사람들, 가끔은 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 채 떠들며 일렬로 함께 걷고 있는 무리의 빠른 말소리와, 그에 반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 등. 세상 바쁜 사람인 척 구는 나는 항상 그들을 앞질러 지나간다. 마치 참을 수 없는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나 역시도 애인과 싸우거나 업무 연락이 오면 액정만을 쳐다보느라 걸음이 느려지면서. 타인의 짜증을 돋워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 나는 아닌 척, 그랬던 적 없는 척. 너그럽고 그릇이 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과는 항상 거리가 먼 내 현실의 일상.

 

오늘 앞지른 어떤 남자는 릴스를 올려 넘기는 손가락이 그의 걸음보다 빨랐다. 지하철이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고, 역내에 사람이 많아 타려던 지하철을 놓칠 수도 있고, 하다못해 사람과 부딪칠 수도 있는데. 온갖 변수가 가득한 구간을 걸으면서도 자극을 떼어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숱하다. 못된 나는 그들의 평소 삶이 어떠할지 감히 상상해보다 이내 멈춘다. 함부로 추측하는 것은 정말 아찔한 짓이다. 이런 못된 짓을 계속하다가는 괴상하리만치 짙은 농도의 선입견을 지닐 수도 있겠다고, 정말 되기 싫은 어른이 될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를 혼냈다. 나름 오랜 기간에 걸쳐 굳어진 고유의 척도로 말없이 타인을 재고 판단하는 사람을 꽤 보았지만 전부 닮고 싶진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을 도리질을 했다. 보폭을 넓히며 성큼성큼 걸어 대충 사람이 없는 칸 앞에 선다. 그러곤 다시 책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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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의 소설은 최고다. 현실에 매달려야 하는 한낮의 오후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넓힐 수 있다. 자, 이제 손익 따윈 없어도 되는 시간이야. 하고 싶은 생각 다 해. 오늘 다 읽은 책은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팔을 뽑아보지 않는 이상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로봇을 단순히 기계로 여기며 쉽게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익숙해지면 성능이 떨어진 노트북을 버리는 것처럼 쉽게 버릴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살아 숨 쉴 시대에서는 겪어볼 수 없는 삶을 사실적으로 마음껏 상상해 본다. 미래에는 이런 지하철을 타기는 할까. 과거에는 이 거리를 얼마나 걸려서 갔을까.

 

두 자리 정도 건너 케이크를 소중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상자를 손에서 떼지 못하고 있다. 조마조마할 테다. 자식, 배우자, 부모님 중 누구를 위한 것일까. 본인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하얀 생크림 케이크에 꽃이 올라간 것을 보니 기념일 케이크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주름 없이 매끈한 그의 정장은 정말 깨끗했다. 홀로 살기 시작한 뒤로 다림질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시선이 갈 뿐이다. 저렇게 ‘반듯’한 사람들은, 당사자들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저런 단정한 모양새는 아침에 다림질해야만 나오나. 밤에 매일 다림질을 해놓고 어깨가 두꺼운 옷걸이에 걸어놓는 걸까. 며칠 전에 봤던 스팀다리미를 정말 사볼까. 내 옷은 매일 구겨져 있는데, 인상이 영 안 좋으려나. 저런 정장은 얼마 하지, 나중에 애인 사주고 싶은데.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종내 나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온다. 나는 항상 나만 생각한다. 지속적인 주시는 예의가 아니기에 시선을 거두었다.

 

갑자기 옆 사람이 인기척이 느껴질 정도로 내 쪽으로 붙어 기웃거린다. 지하철에는 생각보다 남의 핸드폰을 훔쳐보는 사람들이 많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신데요. 적당히, 너무 과하지는 않게, 당신의 자세가 언짢음을 드러낼 수 있는 정도로만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마주한 동그랗고 악의 없는 눈동자. 혹시 내리세요? 끄덕끄덕. 그리고 또 이어진 눈인사. 나는 또 나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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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항상 이런 식이다. 내가 웃으며 사글사글 굴면 정색하며 인색한 표정을 짓고, 내가 정 없이 굴면 넉살 좋게 다가오며 예의를 차린다. 그럼 항상 나만 바보가 되고 나쁜 년이 된다. 하마터면 또 넘어가고, 또 속을 뻔하고.*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것인지 알고 싶지만(당최 알 수 없지만), 그냥 내내 웃고 있으면 나만 기분이 상하지 타인에게는 피해를 줄 일이 없어서, 웃고 있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마음이 썩 넓지 못한 나는 자주 못생긴 얼굴이 된다. 항상 그런 식이다.

 

에라이..하며 개찰구를 통과한다. 내 비틀린 표정이 평온했던 그의 퇴근길을 미묘하게라도 비틀어 놓았을까 봐 신경이 쓰인다. 발끝을 본다. 사방으로 수많은 발이 바삐 움직인다. 하루의 어느 시점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이 사람들의 오늘은 어땠을지, 내 하루와 비슷한 하루가 단 하나라도 있을지 궁금해하다 보면 내가 타야 할 마을버스가 도착한다.

 

출구 앞에서 받은 필라테스 전단지를 접어 가방에 넣곤 버스에 올랐다. 이런 건 받지 않는 게 나은 걸까, 아니면 한번에 3장씩이라도 받는 게 더 나은 걸까. 할머님들의 빠른 퇴근을 돕기란 정말 쉽지 않다. 어차피 버려질 종이들이라 애초에 전단지 홍보를 금지하는 게 맞다. 한반도 기후가 아열대가 되어가는 판에 종이를 함부로 쓰다니. 하지만 받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주고 보려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사실 안 받을 수도 있는데, 추위나 더위에 더 유약하신 분들이 바깥에서 각자 할당된 몫을 다하려 하는 모습을 보면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냥 지나치는 날엔 종일 신경이 쓰이고, 예의를 차리지 않은 것만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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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이 많은 버스에서는 글자를 읽으면 시력이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보지 않는다. 앞에 앉은 여자는 SNS를 보고 있는 듯하다. 손가락이 위로만 까딱거리더니 멈칫하고는 옆으로 슥,슥, 움직인다. 액정 속 편집된 타인들의 삶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알 수 없어서 흥미롭다. 이 사람은 무엇을 자랑하고 싶고 무엇을 숨기고 싶은 걸까. 다만, 타인에게 흥미로워지는 만큼 나 자신에게는 흥미가 줄어든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것만큼 정신 사나운 게 없다. 전날 밤에는 저녁 내내 온갖 재미난 밈을 보고 푹 쉬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출근길에 입으려 했던 옷이 빨래통에 들어있다든지 하는 그런 성가신 것들이 나는 너무 싫다. 그래서 줄이려고 노력은 하는데 영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버스에서 내리며 노래를 멈추고는 이어폰을 뺀다. 한 커플이 하나의 전동킥보드를 같이 타고 지나간다. 짜증이 확 오른다. AI가 감시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저들의 낭만일 수는 있겠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옳다고 본다. 터벅터벅 30초 정도 걸으면 1시간 20분에 가까운 퇴근길이 끝이 난다. 오늘도 착한 사람은 되지 못한 하루. 짜증의 빈도가 더 높았던 것 같은 하루.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가 절반이 넘게 지나갔다.

 

항상 넓은 마음으로 웃으며 살자고 다짐해 보지만, 외출할 때마다 전장에 나가는 전사의 마음으로 각오하고 다짐하며 나가는 습관은 어찌할 수가 없다. 그건 내 의지와 무관하다는 걸 알면서도. 수도꼭지를 돌리자 미처 데워지지 않은 물이 샤워기로 쏟아진다. 차갑지만 잡생각을 잊기에는 효과가 매우 좋다.

 

씻고 난 뒤 조금 뒹굴뒹굴하다, 며칠 전에 사둔 와인과 치즈를 꺼낸다. 한때는 모든 장면이 내 심경 같아 즐겨 보고 단행본까지 구매했던 만화책을 펼쳤다. 와인이 들어가서인지, 괜히 그 시절이 그리운 듯한 기분이 들어 구글 드라이브를 열어보았다. 불안정하고 많이 흔들렸던 날들이었지만 그때 찍은 밤하늘과 이파리가 흔들리는 나무, 여행 갔다가 보았던 성의 야경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립다고 하기엔 우울했던 시절이라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도 같은데, 그리움이 항상 좋은 것만을 향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외로워서 더욱 끈질기게 잡았던 타인의 손들, 천착에 가까웠던 기록, 찢어버린 활자들과 그 모든 것이 속에 쌓여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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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삶은 끊긴 적이 없는데 산발적으로 기억되고 단편적으로 구분된다. 아, 저 시절엔 저랬지, 하며. 그 이후로도 쭈욱 살아오고 있는 거면서, 기억들이 나를 이루는 것이라고 느끼지도 못하고, 마치 그 시절의 나는 로그아웃한 지 한참 지난 것처럼 군다. 너 대체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니. 이런 소설을 봤었나? 아냐, 그 영화 인물이 이렇게 말한 거잖아. 책에선 안 그랬어. 이건 O가 말한 거잖아. 이건 J가 그랬고. 끊긴 적 없는 오늘 하루조차 토막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일 테다.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잊는다니까. 다만 많은 순간을 깡그리 휘발시키며 잊고 싶지 않은 욕구도 가득할 뿐이다. 오늘의 하루를 미간을 달싹이며 기록하는 지금처럼. 오늘도 착한 사람은 되지 못했고 그릇을 더 넓히지도 못했지만, 그럭저럭 보람차게 보낸 것 같다. 내일은 꼭,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어제도 분명 이 생각을 했었던 것 같지만.

 


* 비비, <인생은 나쁜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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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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