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좋아서 하는 공부 -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도서]

‘언젠가’에서 ‘어느새’로, ‘어느새’에서 ‘이제는’으로
글 입력 2023.07.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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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그런 질문들이 있다. 보여주기 위해 이뤘던 성취와 지난한 날들을 떠올리게 하는, 나를 증명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에 숨이 턱 막히는. 그런데 이 정도는 이미 몇 수 앞에서 예상했다는 듯, 미리 답변부터 하고 보는 제목에서 저자의 엄청난 경험치가 느껴진다.


성과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의 틈을 비집고 어떻게든 자신의 쓸모와 역할을 찾으려 애쓰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도 전에 너무 많은 선택들을 떠안게 되곤 한다. 어느새 시간은 사라지고 책임만 가득 생겨버린 이들이 새로운 도전의 관문을 지나려 할 때, 세상은 선뜻 응원을 건네는 대신 단 세글자로 이루어진 "굳이 왜?"라는 비수를 꽂는다. 너만은 실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걱정 어린 조언들, 결정을 가로막는 반문들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주말만을 기다려 온 직장인이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일상에서는 크게 쓰임이 없을 어떤 공부를 위해 길을 나설 때는 그만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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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다른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산다. 그것은 자신이 나고 자란 현재의 땅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다. 자발적인 선택이 대개 그렇듯이, 마음에 품고 사는 다른 장소에는 개인적이고 내밀한 취향과 꿈, 이상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또한 구체적으로 예정된 가까운 미래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곳을 향한 열망과 그리움은, 역설적으로 현재를 더 잘 살기 위한 노력에서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내가 오롯이 ‘나’일 수 있는 어떤 곳이 있다는 사실은, 때로 현재를 살아 내는 데 가장 큰 위로가 되니까.

 

(p.7)



우리는 무엇에 쫓기고,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걸까. 그렇게 해서 되고 싶은 오롯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자각하기도 전에 주어진 수많은 의무와 타인의 시선들이 내면에서 뒤섞인다. 나는 그런 ‘나’를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환상이 가득한 채로 마음에 품고 사는 ‘다른 나라’라는 곳은, 다른 만큼 ‘말이라도 해 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자는 10대 후반에 떠난 어학연수를 시작으로, 살아온 세월만큼을 프랑스에 머물면서도 결국 이 나라에서 자신을 늘 완벽한 타인으로 만들었던 외국어라는 언어적 장벽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여행 중 이방인으로서 기차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했던 공포감이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에게 받은 응원에 일순 사랑으로 바뀌었던 그 장면 때문에, 저자의 외국어 공부는 다시 시작된다. 지겨울 만큼 익숙한 열등생의 기분, 휘몰아치는 의심과 불안, 또다시 무수하게 겪을 좌절을 짐작하면서도 저자는 다른 언어의 사람들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생각을 나누며 소통하기 위해 외국어 공부의 진정한 의미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저자는 즐거움 외에 다른 목적은 없는 외국어를 배우는 일을 한없이 무거웠던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표현한다. 다만 궁금했고, 사랑해서 그 도피가 계속되었기에, 꾸준함이 차곡차곡 쌓였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어엿한 13년 차 직장인이, 이탈리아어에 있어서는 세 살짜리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절망과 성취를 다시 반복한다. 미숙해도 실수를 해도 괜찮은 초보의 권리를 되찾아 마음껏 새로운 배움을 누린다. 그렇게 외국어 공부는 해방감과 새로운 소속감을 넘나들며 성숙한 자유를 이루어 낸다.

 

 

다다를 수 없을지라도 그 자체로 마음을 충족시켜야 하는 일. 언젠가 소멸할 것을 알면서도 일상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 삶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

 

(pp.100~101)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머리의 일만이 아닌 경험과 감각이 필요한 시간의 일이며, 노력해도 당장 늘지 않는 끝없음의 허무와 싸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다만 궁금해해야 한다.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삶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가를. 어른이 되어 꼭 배울 필요 없는 외국어를 공부할 때, 비단 외국어만 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미래의 방문에 대한 기약 없는 약속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러므로 더욱 뜨겁고 순수한 사랑의 의지를 당당히 내비치는 것. 그런 감동만으로도 이 여정의 의미는 충분하지 않은가.

 

이렇게 넓어진 세상 속에서라면 우리는 생각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자발적으로 일으킨 인생의 사건을 괜찮다고 여기는 순간, 내가 주도하는 삶의 영역은 ‘언젠가’에서 ‘어느새’로, ‘어느새’에서 ‘이제는’으로 넓어지게 된다.

 

어쩌면 완성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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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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