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괴물에게 돌을 던질 권리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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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의 진짜 정체, 아몬드
반대일수록 끌린다는 말이 있다. 자신과 다른 모습에 강렬한 자극을 느끼며 흥미가 돋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아몬드』가 그러했다.
책을 읽던 초기에는 나와 극단을 달리는 윤재의 모습은 호기심을 자극했다. 무감한 표정이 돋보이는 표지. 표지 속 소년은 어딘가 나른해 보이기도 하고 지루해 보였다. 어디에서 비롯된 권태일까. 윤재의 상태는 아몬드를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나에게는 아몬드가 있다. 당신에게도 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장 저주하는 누군가도 그것을 가졌다. 아무도 그것을 느낄 수는 없다. 그저 그것이 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몬드는 우리가 하루 영양을 위해 섭취하게 되는 견과류가 아니다.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우리가 느낄 수 없는, 깊숙한 어딘가에 단단히 박혀있다고 '편도체'를 일컫는다. 편도체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다.
외부에서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면 편도체, 즉 아몬드가 감지해 문제에 대한 반응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기쁨, 슬픔,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건 편도체 덕분이다. 그러나 윤재의 편도체, 아몬드는 남들보다 작았다. 그래서 모든 외부 자극에 무감했다.
16번째 크리스마스, 윤재의 할머니가 살인을 당하고 어머니가 사고로 쓰러지게 되는 날조차도 말이다. 어머니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침 받았던 감정 교육도 실전 앞에서는 쓸모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윤재를 보고 가족의 사고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괴물 같은 아이가 돼버렸다.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알아주는 걱정 인형이자 감정 부자이다. 따라서 어떠한 매체를 접할 때 큰 각오가 요구된다. 그래서인지 필자에게는 덤덤한 사람, 의연한 사람이 선망의 대상이다. 날것의 감정을 잘 갈무리하는 것은 어느덧 이십 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가장 어려운 과제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감정을 모두 남에게 내비치지 않는 윤재의 모습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내게 윤재의 16번째 크리스마스와 같은 비극이 일어난다면? 오열하고, 범인을 증오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개탄하겠지. 아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 길고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윤재같이 반응하는 게 오히려 좋으려나.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이지만, 과하더라도 나답게 슬픔을 받아들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라면 응당 느끼게 되는 감정들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슬픈 상황에도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세상에 큰 부분을 강제로 거세당한 것 같았다.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윤재의 무감함이 너무나도 안쓰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특징이라면 다채로운 감정을 느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 인간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본질을 손가락질받아야 하는 삶은 이제 막 가족을 잃은 윤재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이 책을 읽으며 ‘절대 세상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앞선 독백처럼 책 곳곳에는 윤재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나와 당신의 모습이 담겨있다. 윤재는 보통 사람들인 우리를 향해 우리가 지닌 모순을 지적한다. 우리는 감정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감정에 근거해 어떠한 대상이나 현상을 쉽게 판단하려 든다. 우리는 절대신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본인 쪽으로 편향됐다.
자신에게 보이는 모습만을 보며 그것을 통해 느낀 감정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오류를 선입견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쉽게 선입견에 사로잡힌다. 감정이 없어 오히려 감정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윤재의 모습에 문득 ’감정‘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게 바라본 감정은 옳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걱정 인형이자 감정 부자이다. 감정은 인간적이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적이며 윤재보다 떳떳한 사람인가. 감정이 풍부하기 때문에 나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윤재는 괴물이라고 해야 할까. 윤재를 감정도 못 느끼는 괴물이라며 돌을 던질 권리가 필자에 있는 것일까. 꼬리를 무는 물음이 이어졌다.
나의 세상은 나만큼이나 모순이 가득한 삶이다.
기아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기부가 필요하다는 영상에는 당장 내 삶이 더 팍팍하다며 고개를 돌리고, 눈앞에 사고 현장이 펼쳐져도 현장에 직접 연관되기 무서워 먼발치에서 발만 동동 구른다.
그런 와중에 나의 행복, 나의 성취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곤 한다. 어떠한 현상에 대해 죄책감과 무력감을 모두 느끼기 때문에 종국에는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에서는 수많은 인간 군상을 보여주며 다양한 그들에게 공감해 줄 것을 이야기하나 실제 우리 사회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상태이다. 윤재는 본인의 아몬드만이 남들과 다르게 작아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으나, 어쩌면 우리 모두 작은 아몬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오만에서 탈출하기
만약 윤재가 괴물이라면 윤재에게 돌을 던질 권리가 당신에게 있는가. 없다. 사회는 윤재를 보고 감정 없는 괴물이라고 칭했으나 내가 느낀 윤재는 괴물이 아니었다.
우리의 식견은 한정적이기에 누군가에게 돌을 던질 권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아몬드가 남들보다 작다고 해서,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해야 할 특혜는 없다.
윤재가 감정의 둑이 터져 나왔을 때 책에서 ‘비로소 나는 인간이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성장했다는 표현이라는 관점에서는 딱 맞는 표현이지만 나는 윤재가 원래부터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비인간(괴물)을 나누기에 감정이라는 기준은 너무 불완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올바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감정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아몬드』는 그에 대한 해답으로 ‘공감’을 이야기한다. 공감(共感),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감정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만의 감정에 집중하기보다 타인의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렇게 느껴봐야 한다.
우리가 남을 괴물이라고 쉽게 판단하는 것도 내 감정에만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감정에서 상대방의 감정으로 이어져, 우리의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 괴물이라는 대상은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이도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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