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덕질하는 마음 - 일상을 다채롭게 만들기 [문화 전반]

좋아하는 것으로 일상이 뒤덮일 때
글 입력 2023.07.0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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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재채기처럼 숨길 수 없다 했다. 가수나 배우를 덕질하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가 좋아하던 건데”, “-도 그렇게 말했는데”, “-가 여기 갔었는데”라면서 모든 대화의 흐름이 그 사람으로 귀결되곤 한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너무 그 이야기만 하지 않도록 억눌러보지만, 의식의 흐름이 자꾸 그쪽으로 가는 것은 멈출 수 없다. 좋아하는 마음은 이다지도 억누르기 힘들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사람이라면, 온 세상이 그 사람으로 뒤덮이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길을 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다. 그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고, 어떤 사물을 보거나 장소를 가든 어김없이 그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고야 만다.

 

좋아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닐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덕질’하는 마음은 나의 일상을 그것으로 온통 뒤덮기 마련이다.

 

어렸을 때 나는 사극을 정말 좋아했다.

 

명절 때마다 할머니 집에서 찾을 수 있었던 온갖 옛날 물건들을 모아놓고 혼자 역할극을 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예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동검(물론 진짜 검은 아니고 뭉툭한 단도처럼 생긴 물건이었다)은 할머니한테 달라고 졸라서 아예 집에 가져온 기억이 난다. 출생의 비밀이나 신비한 힘이 숨겨져 있는 동검일 거라 상상하곤 했다.

 

집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들도 상상 속 소품이 될 수 있었다. 난생처음 본 사극인 <여인 천하>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주방에 굴러다니던 보자기를 마치 조선시대 여자들이 저고리로 얼굴을 가렸던 것처럼 뒤집어쓰고 다닌 걸 기억한다. 안방에서 찾은 엄마의 패물함은 대감집에 뇌물 바치는 상자로 변모했다. 고깃집에서 후식으로 스테인리스 양푼에 누룽지가 담겨 나올 땐 마치 하옥된 죄수가 미음을 떠먹는 것처럼 구슬픈 마음으로 '겨우 한술 뜨기도' 하고, 쓴 한약을 먹어야 할 때도 꼭 둥그런 그릇에 담아 사약을 받은 심정으로 비통하게 마셨다.

 

물론 이 모든 사극 놀이는 나의 은밀한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졌다 (다행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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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은 곧 사약이었던 그 시절

 

 

한창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땐 온 세상이 영화 속 장면 같았다.

 

카페에 앉아서 친구랑 수다를 떨다가도 조명 때문에 친구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면서 악당을 촬영할 땐 저런 식으로 조명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창문이나 문을 통해서 한 사각 프레임 안에 여러 서브 프레임이 생기는 풍경을 보는 걸 좋아하기도 했다. 특히 한옥 마을을 내가 좋아했던 이유는 한옥의 구조 특성상 문지방 너머와 사이로 여러 사각 프레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가끔 일상에서 정적이 느껴질 때는 독립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상상하면서 앰비언스 사운드를 귀 기울여 감성적으로 듣기도 했다.

 

지극히 평범한 순간도 영화 속 프레임 안이라고 생각하면 특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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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내가 찍었던 한옥 풍경.

문지방 프레임 안에 다른 문지방과 창문들의 서브 프레임이 보인다.

 

 

현대무용 취미를 막 시작했을 때는 일상 속 동작을 무용처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원래 현대무용에는 일상적인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동작이 많다. 누워있다가 일어나는 동작, 구르는 동작 등 초급 시간에 배운 기초 동작을 생각하면서 일상생활에서도 무용하는 마음으로 우아하게 움직였다.

 

찬장에서 컵을 꺼낼 때도 괜히 한 번씩 원을 그리면서 화려하게 꺼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이동할 때는 난데없이 립 점프를 하면서 뛰어다니기도 했다. 한밤중에 침대 위에서 뒷구르기 동작을 해보다가 추락해서 허리가 다친 작은 사고가 있었던 것은 나만의 작은 비밀이다.

 

그땐 몸을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내 안에선 예술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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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때 효과적으로 이동하는 방법 (feat.립 점프)

 

 

요즘 나의 덕질 대상은 클래식이다. 클래식은 흔히들 잔잔하고 웅장한 음악인 줄로만 알지만, 사실 클래식에는 우리가 아는 모든 음악 장르가 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수많은 색채와 다양한 감성을 가진 곡들이 넘쳐난다. 덕분에 방대한 레파토리의 바다에서 매일 내 기분과 상황에 따라 곡을 골라 듣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밤마다 내일 무슨 옷을 입을지와 함께 아침 출근길에 무슨 음악을 들을지 고민하며 잠든다.

 

내가 아는 가장 슬프고도 웅장한 곡, 예를 들어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나 엘가의 <님로드> 같은 곡을 들으면서 출근하면 왠지 대의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한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

 

퇴근길에는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를 들으며 인간도 인형도 아닌 페트루슈카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마치 일에 지친 나의 퇴사 욕구와 같다고 생각하며 약간은 가볍고 들뜬 마음으로 귀가한다.

 

다양한 클래식 곡과 함께라면 평범한 일상도 시시각각 장르가 변하는 특별한 이야기가 된다. 헤드폰만 있다면 나는 나만의 세계에서 홀로 기뻤다가 슬펐다가 요동치는 감정을 마주하며 매 순간 감동할 수 있다.

 

 

퇴근길 플레이리스트로 손열음의 <페트루슈카>가 제격이다.

 

 

무언가를 덕질하는 마음은 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다채롭게 만든다. 일상 속 물건들이 신기하고 재밌는 소품이 되고, 언제나와 같은 흔한 풍경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모두가 똑같이 무료한 삶을 살아도 나만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바쁘고 흥미롭게 흘러간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마음이든, 드라마를 좋아하는 마음이든, 클래식을 좋아하는 마음이든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진짜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만 있어도 그것으로 내 삶을 온통 물들게 할 수 있는 상상력만 있다면, 삶은 충분히 재미있게 살만한 것이 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 맘껏 덕질하는 삶을 누려보자.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온 세상이 놀이동산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일상을 만끽해 보자.

 

오늘도 나는 내일 출근길에 들을 곡을 고민한다. 내일은 처리해야 할 업무가 너무도 많아서 혼란한 하루가 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는 가장 혼란한 곡인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어야겠다. 대략 30분짜리 곡이니까 출근길 시간과도 딱 맞는다. 내일을 기대하며 기분 좋게 잠들 수 있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란스럽고 예측불허한 게 매력인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강력 추천하며...

 

 

[황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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