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결국에는 사랑이 이긴다, <이리와 안아줘> [드라마]

글 입력 2023.06.17 11:2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리와 안아줘 포스터.jpg
MBC 공식 홈페이지, <이리와 안아줘> 포스터

 

 

2018년 MBC에서 방영된 <이리와 안아줘>는 한 살인사건으로 인해 엇갈린 삶을 살게 된 남녀의 기구한 운명을 그린 드라마로, 장기용, 진기주, 허준호, 윤종훈, 김경남, 서정연 등 많은 배우가 출연했다. 로맨스 스릴러 장르 속 진짜 사랑 이야기를 만나보고자 한다.

 

 

1. 피는 물보다 진할까?

 

<이리와 안아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명제를 꾸준히 부정한다. 우리가 많이 보고 듣는 상투적인 표현. 공감하고 이해하기 전부터 들려오는 절대적 명제다. ‘ㄱ’을 ‘기역’으로 발음하듯 마땅히 그러한 것. 모두가 쉽게 의문을 표하지 않는 어떤 것. 그러나 <이리와 안아줘>는 그 절대성 앞에 맞서 혈육이 아닌 자들의 인연을 그려간다.


1) 사이코패스와 그의 아들들

 

극 중 윤희재(허준호 분)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그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다.’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는 그런 그의 아들인 윤나무(장기용 분)가 채도진이 되어 경찰대학교 면접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진은 면접에서 아버지인 윤희재를 언급하며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사죄를 이야기한다. 그를 피하는 사람에게 도진은 ‘사이코패스 그거 뭐 유전도 아니고 옮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말한다. 피가 전부는 아니다.

 

시간이 흘러 도진은 우수한 성적으로 경찰대학교를 졸업한다. 하지만 그의 졸업식은 가족, 동기들과 사진을 찍고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현장이 되지 못한다. 윤희재에게 살해당한 피해자의 유가족이 찾아와 달걀을 던지기 때문이다. 지금껏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도진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는 윤희재와 피가 섞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는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행복할 수 없는 걸까? 피해자 유가족들은 자신이 받은 피해는 그 무엇보다 아파하면서 그를 구실로 하여 타인의 행복을 깨트림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채도진은 그들의 피해와 상처의 책임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를 사이코패스의 아들이라며 괴물이라 욕하고 비난하지만 도진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드라마는 그를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그려낸다. 그렇게 의도적인 연출이 말한다. 윤나무(채도진)와 사이코패스 윤희재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도진에게는 이복형제가 있다. ‘윤현무(김경남 분)’. 고등학교 재학 중 동급생을 구타하여 징역형을 받은 인물. 갖은 전과가 있으며 아버지인 윤희재 함께 복역하기도 한다. 현무의 출소 이후 윤희재를 모방한 듯한 범죄가 발생한다. 연쇄적인 범행 중 미수로 그친 첫 범행만이 현무의 소행으로 밝혀진다. 한재이(진기주 분)에게 피 묻은 망치를 보내는 등 주변인을 향해 복수라 일컫는 일방적 증오를 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첫 범행 이후 발생한 피해는 윤현무가 아닌 염지홍(홍승범 분)의 소행이었으며 박희영(김서형 분) 기자 살해 피의자 역시 그였다. 윤현무가 윤희재를 닮고자 벌였던 범죄 행위와 재이를 향한 분노 모두 사랑받고자 했던 이의 결핍과 상실감에서 기인한다. 몸싸움 중 칼에 찔린 도진의 상태를 물어보고 윤희재에게 폭행당하는 채옥희를 끝까지 감싸는 그의 행동이 그 결핍을 반증한다. 그것이 현무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드라마는 정당성을 따져가며 현무를 청렴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본인이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윤희재와 윤현무가 다른 부분이다. 무엇이 ‘잘못’인지 아는 것. 윤희재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윤현무는 더는 괴물이 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윤희재와 그의 아들들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혹자는 말한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리와 안아줘>는 열심히 부정한다. 열 중 아홉이 달라도 하나가 같으면 혈연을 운운하는 세상에서 드라마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남겨진 유족이 아닌, 누구도 생각하지 않아 외면받는 가해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삶을 조망한다. 혈육이라는 연으로 함께 가해자가 되어버린 이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작품이다.


2) 채옥희와 채도진, 채소진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명제를 ‘피’가 아닌 ‘물’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어떨까? 드라마는 물의 위대함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채옥희(서정연 분)는 윤희재의 네 번째 부인이자 소진의 친모다. 그녀는 현무와 나무에게 잔소리를 쏟아내면서 어머니의 애정을 보여준다. 윤희재의 정체를 알고는 소진을 데리고 도망치지만 결국 두 형제를 책임지고자 한다. 의붓어머니로서 본인이 낳지 않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에 공감하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 구성원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겪지 않은 것에 공감하기까지는 갖은 노력이 필요하다. 드라마는 묵묵히 그 역할을 해냈다. 경찰서 앞에서 다시 만난 나무에게 아줌마와 함께 가자며 싫으면 성인 되자마자 버리고 나가도 된다고 말한다. 수감 중인 현무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매번 가게 앞을 서성이며 까만 사내를 찾는다. 종국에는 윤희재에게 붙잡혀 위기에 처했을 때조차 아들들 손끝 하나 건들지 말라며 목숨을 내건다. 그렇게 도저히 공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사랑을 의심 하나 없이 믿게 된다. 대신 죽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녀를 ‘어머니’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명명하기 힘들지 않을까.

 

그렇게 윤나무는 채도진이 된다. 어릴 때부터 그를 잘 따르던 소진과 함께 어머니의 성을 따라 한 가족이 된다. 윤희재로 인해 갖게 된 각자의 죄책감을 숨긴 채 서로를 위하고 보듬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투명한 마음이다.


3) 윤현무와 길무원

 

<이리와 안아줘>는 낙원과 나무뿐만 아니라 주변인에서 그칠 수 있는 무원과 현무의 이야기까지 풀어낸다.

 

윤현무는 어쩌면 물보다 피를 믿었던 사람 아닐까 할 만큼 윤희재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을 수 있다. 학교 폭력으로 수감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옥희와 소진이 도망가고 윤희재가 검거되며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 틈에서 현무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함께 교도소에 있었던 아버지인 윤희재였을 것이다. 또한, 가족을 그렇게 만든 것이 모두 경찰에 신고한 나무의 탓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현무에게 남은 것은 더더욱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물’을 믿지 않는 듯 옥희를 늘 아줌마라고 부른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채소진이 된 동생을 항상 ‘윤소진’이라고 한다. 마치 제 동생을 부르는 듯 행동한다. 현무는 여전히 그 과거에 멈춰있었다. 그런 그는 자신이 다치게 한 도진의 안부를 묻고 소진의 퇴근길을 쫓으며 옥희의 가게에 서성인다. 내뱉는 법을 잊었지만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은 사랑임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던 것이다. 옥희는 그런 현무에게 ‘어머니’가 되어준다.

 

친부모를 잃고 낙원(진기주 분)의 친부를 따라 ‘길무원(윤종훈 분)’으로 살아가는 낙원의 오빠. 하지만 소중한 양부모마저 윤희재의 손에 잃게 된다. 사건 당일 늦은 귀가 후 모든 것이 정리된 사건 현장에 들어오게 됐다. 무원은 그렇게 낙원을 지키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삶을 따라 검사가 된 그는 현무의 사건을 명목으로 병원을 찾는데, 그곳에서 무원과 현무의 캐릭터를 정리하는 한 문장이 등장한다. ‘너도 가족을 못 지켰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 현무가 무원에게 건넨 말이다. 윤희재에게서 가족을 지키지 못한 길무원,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을 지키지 못한 윤현무. 그들은 가족을 지키지 못한 유일한 가족 구성원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낙원을 지키는 무원과 복수를 관두고 옥희와 소진을 지키기로 한 현무. 한 가정의 첫째로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인물. 정반대인 듯한 두 사람을 관통하는 공통된 환경이 그들을 그 세계에 발붙이고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든다.



2. 낙원과 나무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낙원이 되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행복하고 든든할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면, 사회적 관념에 어긋나는 관계에 놓인 이들이라면 어떠할까. <이리와 안아줘>의 길낙원과 윤나무는 그러한 어긋남 속에서 안타까움으로 점철된 관계가 되어 간다.


1)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

 

이사 오고 전학 온 곳에서 만난 낙원과 나무. 그들은 삽시간에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평범한 중학생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두 사람은 윤희재라는 희대의 살인마로 인해 그 평범함을 송두리째 잃는다.

 

어쩌면 두 사람은 잃어버린 평범함의 자리에 서로를 눌러 앉힌 것이 아닐까. 도진이 된 나무는 경찰대 휴게실 자판기의 낙원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낙원은 어디서든 그녀를 찾을 수 있도록 한재이라는 이름으로 배우가 되었다. 어릴 적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는 낙원과 그녀를 내내 바라보는 나무.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지만 그로 인해 서로를 절대 잊지 못하는 관계가 되었다.


2) 길낙원과 윤나무, 한재이와 채도진

 

길낙원이 한재이가 되고 윤나무가 채도진이 되었어도 그들은 여전히 발랄했고 다정했다. 재이는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씩씩하고 밝게 살아간다. 쌀쌀맞은 선배 앞에서도, 수군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웃으며 자신을 소개한다. 어머니 지혜원(박주미 분)의 이름에 가려지지 않고 한재이라는 이름으로 떳떳이 성공하기도 한다.

 

똑똑하고 다정했던 윤나무는 그대로 채도진이 된다. 경찰대 수석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도진은 여전히 다정하게 살아간다. 동기를 걱정하고 후배를 도와주며 따뜻함을 나눈다. 옥희의 일을 돕고 소진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평범함을 잃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순간 다시금 길낙원과 윤나무가 된다. 재이는 인터뷰에서 이상형에 관한 질문에 ‘보면 눈물 날 것 같은 사람’이라고 답했고 도진은 칼을 맞은 몸으로 재이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싶은 생각은 그들의 애절한 몸짓 앞에 사그라든다. 과거에 마주했던 유일한 탈출구가 사라진 그들에게 재회란 어쩌면 신기루가 아니었을까?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고 가닿을 수 없는 것. 두 사람 모두 다시 마주한 탈출구가 동시에 낭떠러지임을 알고 있다. 최대한 마주하지 않으려 하지만 마주쳤을 때는 필사적으로 서로를 담아내기 바쁘다. 강한 자성을 가진 자석처럼 이끌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어떤 관계에 놓였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악은 여전히 윤희재 하나뿐이고 드라마는 계속해서 혈연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도진이 가해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할까? 누군가는 기함할 관계일지 몰라도 한재이와 채도진은 여전히 서로의 낙원과 나무였다. 그 흔한 연애를 알리는 신호탄은 없다. 좋아한다, 사귀자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말의 몫은 없었다. 너는 꼭 나무 같다는 낙원의 말과 그녀를 나의 낙원이라고 칭하는 나무의 말뿐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재이와 도진으로 불리면서도 서로를 여전히 낙원과 나무로 부르는 그 이름 자체가 그들의 고백이었다. 당신이 누구의 자식이든, 어떤 이름이든, 어떤 사람이든 여전히 나의 낙원과 나무로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한다.

사랑한다는 말 하나 없이 사랑을 이야기한다.



3. 인간의 잔악함과 사랑의 공존

 

인간은 입체적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흑백논리에 쉽게 빠지고 만다. 상대가 잘못했다면 본인은 결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청백한 사람은 쉽게 존재할 수 없다. <이리와 안아줘>는 그런 인간상을 조명한다.

 

도진에게 달걀을 던진 유가족들, 옥희의 가게에 전화해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 그들의 아픔이 도진과 옥희에게 상처를 줄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윤희재와 그들은 철저히 타인이고 잘못된 방향의 화살은 정당한 몫이 아닌 공격을 싣고 날아갔다. 인간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알면서도 엉뚱한 화살을 쏜다. 그렇게 도진과 그의 가족이 다치고 상처를 얻게 된다.

 

윤희재의 조력자였던 염지홍과 전유라(배해선 분)는 윤희재에게는 어쩌면 호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도와 사람을 죽이고 납치한 범죄자일 뿐이다. 사람들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박희영은 훌륭한 기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파헤치는 사건 관련자들에게 그녀는 상처를 후벼 파는 날카로운 칼날일 뿐이다. 이처럼 <이리와 안아줘>는 낙원과 나무,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통해 인간의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면서도 여러 인물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잔악한지도 이야기한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장 헌신적이면서도 가장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복잡한 인물관계 틈바구니에 잘 녹여낸다.


잔악함과 사랑이 공존하는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낸 관계를 보다 보면 복잡한 미로를 풀 듯 답답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리와 안아줘>가 그려낸 세상 속 관계는 결국 사랑이 이긴다. 낙원과 나무는 함께 나아가고 무원과 현무는 가족의 품에서 따뜻하게 살아간다. 염지홍과 전유라, 그리고 윤희재는 바라던 것은 이루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한 채로 세상과 단절된다. 잔악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사랑을 지켜내기 힘들더라도 결국에 사람은 사랑으로 이겨내며 행복을 찾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리와 안아줘>가 여전히 좋은 이유다. 5년이 지났음에도 계속 찾게 되는 이유다.

 

나에게 <이리와 안아줘>는 사랑의 힘을 알려주어 행복하게 살아갈 용기를 되찾게 하는 소중한 작품이다.


 

[박서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5.01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