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말 먼 곳'이 의미하는 것 [영화]

'안식처'와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오가는 <정말 먼 곳>
글 입력 2023.06.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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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 영화를 참 좋아하는 한 관객으로서 더 많은 사람이 보길 바라는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박근영 감독의 2021년 작 <정말 먼 곳>이다. 이 영화는 감독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박은지 시인의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정말 먼 곳>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는데, 그런 만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시와 인물들의 서사가 이루는 화음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진다.

 

영화는 5년 전 서울을 떠나 강원도 화천의 한 양떼목장에서 일하며 지내고 있는 진우에게 그의 동성 연인이자 시인인 현민과 쌍둥이 동생 은영이 찾아오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진우는 처음으로 자기가 있는 화천을 찾아온 현민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듯하지만, 그들의 평화는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 진우의 쌍둥이 동생 은영으로 인해 깨져버리고 만다. 진우에게 자신의 딸 설을 한 달만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가 설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던 은영은 이제 와 갑자기 설을 데리고 가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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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동안 설을 부모처럼 맡아 키웠던 진우는 설을 쉽게 은영에게 돌려보내지 못한다. 설은 진우를 엄마라고 부르고, 은영이 자신의 엄마인 줄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양떼목장의 주인 중만의 어머니 명순이 세상을 떠난다. 설이 장례식장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친구와 싸우자 진우는 설을 데려가 혼내려 하지만, 화가 난 은영은 사람들이 다 있는 곳에서 설이 자신의 딸이라고 말하며 진우와 현민이 각각 엄마와 아빠를 맡아 설을 키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며 비난한다.

 

소문이 다 그렇듯 진우가 설의 친부가 아닌 것과 진우와 현민이 연인 관계라는 사실은 동네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삽시간에 온 동네 전체에 퍼지게 된다. 진우가 5년 동안 한 마을에서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진우와 현민은 마을 주민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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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경멸을 참기가 어려웠던 진우는 화를 참지 못하고 현민과 싸운다. 결국 현민은 진우를 떠나고, 혼자 남겨진 진우는 양들을 숲에 풀어놓고 생각에 빠져 있다가 설을 잃어버린다. 다행히 다음 날 새벽 숲속에서 설을 찾은 그는 설의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은영과 함께 다시 서울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진우의 '정말 먼 곳'


 

박은지 시인의 시 <정말 먼 곳>에서는 상상 속의 정말 먼 곳을 그리며 살다가 정작 자기가 서 있는 정말 가까운 곳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도 몰랐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박은지, <정말 먼 곳>

 

 

박은지 시인은 정말 먼 곳이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한 것과 달리 박근영 감독은 정말 먼 곳이 ‘안식처’라고 생각했는데, 영화에서 주인공 진우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정말 먼 곳에서는 신기하게도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느낄 수 있다.

 

진우가 있는 강원도 화천의 한 시골 마을은 그가 한때 정말 먼 곳이라고 믿었고, 지금은 정말 가까운 곳이 되어버린 공간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도망치듯이 서울을 빠져나왔던 과거의 진우에게 화천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의 땅이었을 것이다.

 

그가 기대했던 대로 마을은 진우에게 안식처가 되어준다. 양떼목장의 주인 중만과 그의 딸 문경, 그의 어머니 명순,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진우에게 많은 것을 묻지 않고 그를 받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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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때 정말 먼 곳이었던 곳은 영원한 정말 먼 곳이 될 수 없다. 이제 그의 근거지가 된 화천은 어느새 그에게 물리적으로 정말 가까운 곳이 되어 있고,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정말 먼 곳을 찾는다.

 

진우가 현민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섬은 현재의 진우가 정말 먼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그는 현민이 이미 버스가 두 시간에 한 대밖에 없을 만큼 깊은 산골 마을을 멀리서부터 찾아왔는데도, 오토바이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만 있는 먼 섬으로 현민을 데려간다.

 

 

현민: 어디 가 우리?

진우: 멀리.

현민: 멀리?

진우: 응. 아주 먼 곳.

 

 

진우와 현민이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이 섬에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평화롭고도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진우가 그리는 정말 먼 곳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 섬은 진우가 현실을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 될 수 없다. 정말 먼 곳은 말 그대로 이상과 상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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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은연중에 자기가 지내고 있는 화천의 마을도 이 섬과 같기를 바란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현민을 안고, 현민과 대화하고, 현민과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장례식장에서 자기와 현민이 연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진우는 한순간에 자기에게 등을 돌린 마을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또 분노한다.

 

 

 

'정말 먼 곳'의 순리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것은 진우만이 아니다. 진우를 만나기 위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던 현민은 마을의 작은 성당에서 열 명 남짓한 주민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진우와 연인 사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현민의 마지막 수업에는 단 두 명의 수강생만이 나와 자리를 지킨다.

 

 

현민: 우리, 어디 멀리 가서 살까?

진우: 멀리 어디?

현민: 음…그냥. 아무 데나. 아주 멀리 가는 거지. 외국에 있는 목장 같은 데 가서 나도 같이 일하는 거야. 그러다가 돈 좀 모아서 우리 목장도 하나 만들고. 옆에다가 게스트하우스 같은 거 만들어도 좋겠다. 그치. 너 그림도 다시 그리고.

 

 

자기와 진우를 외면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민은 진우가 정말 먼 곳을 꿈꾸듯이 옆에 누운 진우에게 아주 먼 외국에 가서 함께 살자는 말을 한다.

 

그러나 생각에 잠긴 듯한 그의 눈빛은 희망적이기는커녕 체념적이다. 마치 두 사람이 함께 미래를 그려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이,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 멀어지기만 하는 정말 먼 곳의 순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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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정말 먼 곳이 언젠가는 자신의 현실이 되기를 꿈꾸는 진우에게 그런 곳은 이 세상에 없다는 슬픈 사실을 알려주는 건 결국 다름 아닌 그의 연인 현민이 된다. 그는 자기와 현민을 경멸하는 식당 손님들과 싸우려고 했던 진우와 차에서 말다툼한다.

 

 

진우: 여기선 다를 줄 알았어.

현민: 어디나 다 똑같아. 우리 제발 너무 욕심은 부리지 말자. 어?

 

 

자기에게 등을 돌린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진우에게 그건 욕심이라는 한마디 말을 남긴 현민은 결국 다음 날 새벽 진우가 자는 사이 그를 떠난다.

 

 

 

잊어서는 안 되는 '정말 가까운 곳'


 

영화는 진우의 정말 먼 곳과 정말 가까운 곳의 대비를 잘 담아낸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라는 시의 구절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달콤한 꿈에 빠진 채 살아가다가 잠에서 깬 진우의 눈앞에 놓인 오늘은 언제 이렇게 되었나 싶을 정도로 망가져 있다. 사랑하는 현민은 떠나고, 사랑하는 설은 영영 잃어버릴 뻔한다. 평온했던 화천에서의 삶은 정신을 차려 보니 폭풍이 헤집어놓고 간 듯 엉망이 되어 있다.

 

도피하듯 화천에 왔던 진우는 설과 은영과 함께 다시 도피하듯 서울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는 화천을 떠나기 직전에 그가 일했던 양떼목장에서 마지막으로 양의 출산 장면을 보게 된다. 다리를 비틀거리며 차가운 세상에서 혼자 힘으로 일어나려고 애를 쓰는 새끼 양의 모습은 이상하게 진우가 앞으로 걸어가게 될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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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앞에 놓인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내게 더 큰 것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먼 미래만을 바라보는 실수를 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을 지탱해 주는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정말 먼 곳’이라는 꿈이 아니라,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정말 가까운 곳’이라는 오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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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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