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청춘의 우울한 초상

영화 <바보들의 행진>
글 입력 2023.06.0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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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학번, 혹은 유신세대

 청년은 언제나 시대와 불화한다. 시대가 엄혹할수록 청춘의 반항은 거세지기 마련이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국가가 머리카락과 치마 길이까지 단속하던 유신 정권 시절 청춘의 초상을 스크린에 담아낸다. 영화는 초반부의 경희대학교를 시작으로, 연세대의 백양로,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 여러 대학을 보여주는 데 많은 신을 할애한다. 이는 작중 인물들의 신분이 ‘대학생’ 즉 70년대 학번의 이야기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 위해서는 70년대 학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광주에서의 학살을 촬영한 비디오를 접하며 정치적 급진주의 성향을 띠게 된 80년대 학번(소위 ‘386’)과 달리, 70년대 학번들은 상대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이는 기본적인 정치 행위조차 원천적으로 틀어막은 유신이라는 시대상황에서 기인했다. 적극적인 사회참여 대신 이들은 서구의 히피문화, 팝송, 포크음악을 즐겼다. 문화적으로 윤형주와 송창식, 김세환과 양희은, 김창완 등이 이 세대를 대표한다. 경찰의 단속을 피해 도망가는 장발을 한 남성,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대생은 70년대 학번의 전형적인 풍경들이었다.

 

 

맥 빠진 청춘과 정권의 자가당착


 이 억압의 시대에 대학을 다니는 주인공인 병태, 그의 친구 영철은 철학과 학생이다. 영화는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설명하는 교수의 육성, 인근 여대와의 미팅, 술자리 등 전형적인 캠퍼스의 풍광을 현시한다. 스물 한 살의 병태와 영철은 그 나이에 기대되는 열정이나 포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어딘가 맥이 빠져 보이고, 할 일 없이 길거리를 배회할 뿐이다. 그러다가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경찰의 머리 역시 장발이다. 관객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진다. “누가 누구를 단죄한다는 말인가?” 이 신은 정권의 자가당착을 보여준다. 또한 영철이 다니는 대학에서 열리는 체육대회의 분위기는 마치 집회처럼 그려진다. 이는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감독이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위해 선택한 우회적 방법이다. 그런데 비판은 비단 정권만을 향해 있지 않다. 작품은 시대 상황에 소극적 반항만을 하고 있는 당대의 대학생 청춘들을 ‘바보’처럼 묘사한다. 한마디로 감독은 무능한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고래사냥, 그러나 출구없음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정호승, 「고래를 위하여」에서

 

 영철은 작품 중간중간에 계속해서 고래를 언급한다. 그 때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재생되기도 한다. 병태는 미팅에서 만난 영자와 데이트를 즐기지만, 어느 날 영자는 선본 남자와 곧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며 이별을 통보한다. 영철은 미팅에서 파트너로 만난 순자에게 호감을 가진다. 그러나 순자는 말을 더듬고 전망도 보이지 않으며 병역 신체검사에서도 탈락한 영철을 거부하고, 이에 영철은 절망한다. 무기한 휴강에 돌입하여 텅 빈 교정은 이런 절망의 감각을 강화한다. 이렇듯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병태와 영철은 바다로 향한다. 예쁜 고래를 잡으러 떠나겠다던 영철은 바닷가 절벽까지 자전거를 몰고 올라가 드넓은 바다로 뛰어든다. 파국으로 마무리되는 영철의 꿈은 그의 꿈이 그저 현실도피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독재정권을 극복할 수 없다는 극단의 절망, 즉 ‘출구 없음’의 상황에서 청춘의 선택지는 자살 뿐이다.

 

 

사랑의 열차, 희망이거나 속임수이거나


 병태와 영자의 연애담은 영화를 다채롭게 만든다. 앞서 이별을 통보했던 영자는 그러나 입대를 앞둔 병태를 마중 나온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애석하게도 열차는 출발한다. 그 헤어짐의 순간, 입영 열차 차창에서 둘은 키스를 한다. 이 신은 이중의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장면이 극단적 절망 속에서 사랑의 형태로 일말의 희망을 배태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감독이 입대와 사랑이라는 청춘의 바람직한 과업을 표면 배치함으로써 작품에 건전성을 더했고, 이를 통해 검열을 피하고자 했다는 해석이다. 만약 두번째 해석을 따른다면,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1975년 남한은 모든 것이 나빴다.

 

 

2023년의 대학생이 1975년의 대학생에게


 영화가 개봉한 1975년과 2023년 현재 청춘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오늘날의 대학생은 예의 어른이나 지식인보다는 어린애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변치 않는 사실은, 청춘은 언제나 시대와 불화한다는 것이다. 불화, 그것이야말로 청춘을 청춘이게끔 만드는 속성이 아닐까. 아직 사회의 떼가 묻지 않아 순수하고도 반항적이며 치기 어린 그런 모습 말이다.


 

[최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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