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새로운 계절을 나는 법 - 각각의 계절 [도서]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필요하지요.
글 입력 2023.06.07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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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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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각각의 계절>은 작가 권여선이 삼 년 만에 펴낸 일곱번째 신작 소설집으로,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제목은 수록작 '하늘 높이 아름답게'에 나온 마지막 문장에서 가져왔다. 이는 작가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면서 소설 속 각 인물들에게 보내는 말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가졌지만 공통적으로 어떤 특정한 과거의 기억에 매몰돼 있다. 동시에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공허함, 불안감 등 심리적인 결핍을 동반하고 있다. 작가는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하고, 왜 기억하는지, 우리가 왜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지 등 깊고 집요한 물음을 통해 인물들의 기억, 감정, 관계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그려낸다.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왜곡과 미화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권여선의 인물들은 마치 불순물을 제거하듯 자기 합리화의 욕망을 누르고 자신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실수와 과오를 천천히, 깊고 집요하게 짚어낸다."

 

- 편집자의 말

 


작품 속 단어나 배경 또는 수록집 제목 등 7~80년대 사회문화적 배경을 암시하는 대목들이 종종 보이는데, 이는 책 말미에 함께 수록된 권희철(문학평론가)의 해설 '영원회귀의 노래'를 통해 그 의미와 재미를 재발견하고 탐구할 수 있다.

 

 


그 시절의 계절을 기억한다는 것은



작가가 인물들의 입을 빌려 써내려간 문장들은 대체로 예민하고 날카롭고 묵직하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p.36)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p.40)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p.79)


"사람은 절대 그렇게 무구하지 않다."(p.145)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p.172)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p.199)


"과거를 반추하면 할수록 내게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시절의 내가 도무지 내가 아닌 듯 무섭고 가엾고 낯설게 여겨진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p.203-204)

 


작품 속에서 인물들의 지나온 시절을 되새기는 일은 서글프고 씁쓸하게 느껴지지만, 인물들은 이 과정을 통해 과거의 헛헛한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더 나아가 현재의 삶을 직시하고 나아가는 힘을 얻는다.


앞서 '시간이 나를 무력한 관객으로 만든다'고 말했지만 40여쪽을 지나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중략)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p.242)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기억을 더듬다 보면 곱씹을수록 선명해지는 기억과 감정들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은 이전과는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선택이 어떤 미래의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과거의 시절이 뜻하지 못한 순간에 새로운 시절을 이어나갈 희망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 나 자신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다른 흐름이 생긴다. 다른 인물과 사건을 마주하고, 다른 환경에 둘러싸이고, 다른 시선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모든 전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계절로 넘어왔다고 인지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힘을 가질 수 있다.

 

특별 소책자 '어텐션북'에 실린 작가의 편지 속에서도 작가 권여선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필요하지요.

 

새로운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을 길어내시길 바랍니다.

 

 

[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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