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는 시선’의 진화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5.2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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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미끄러지듯 길을 가로지른다. 총총거리는 머리카락, 상쾌한 발걸음.

 

그는 방금 전의 대화를 곱씹고 이후의 일정을 생각하다 문득 길을 가로지르며 하나의 상(image)을 그린다. 그것은 ‘총총거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상쾌한 발걸음’을 가진 여자. 다름 아닌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

 

그는 스스로를 '보이는 대상'으로 놓는다. 타인은 그의 관중이 되고 그를 바라보는 영원한 1열의 관객은 자기자신.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에서 여성의 자아 안에서 ‘보는 자아’와 ‘보이는 자아’의 균열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여성의 주체 깊숙한 곳에서는 '객체'로서의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인데…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의 점심식사’가 당시 외설적이고 문란하게 여겨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마네의 그림 속 여성이 당시 타 누드화 속 여성들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느껴졌던 것은 마네의 그림에서 여성은 ‘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누드화에서 벗은 여성들은 말하자면, ‘보는 시선’을 결여한 존재로, 그가 보고 있는 것이 있다면 타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혹은 익명의 관중)에게 '보여지고 있는' 스스로의 존재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관음하는 이를 튕기고 튕겨 자신에게 돌아온, 각이 깎이고 원형적인, 어딘가 퇴폐적인 것인 반면 풀밭에 앉아 점심식사를 즐기는 여성의 시선은 관음하는 이를 직시하는 직선적인 성질의 것이다.

 

관점을 달리하여 말하자면 당시 미술계는 여성이 ‘보는 권력’을 가지는 것을 문란하게 여기며 안개 낀 시선의 여성을 그림속에 박제시킴으로 현실에서 여성들의 시선을 다시 한번 왜곡시켰을 것이다.

 

‘보이는 여성’을 보고 있는 여성은 어떤 인상을 받았을지 생각해본다. 여성은 다른 여성들의 상을 보며 ‘보이는 객체’라는 모순적인 주체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 문단의 내용은 존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중 누드화 부분과 유투버 '예술의 이유'의 에두아르 마네에 대한 동영상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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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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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 오르세 미술관]

 

 

'보는 권력'에 조금 더 생각해보자. 성경에서 예수의 부활, 텅빈 무덤과 천사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자들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여성은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았고, 여성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수도 없었다고 한다. 하나의 주체가 아닌 여성이 보는 것은 공신력을 가질 수 없던 셈이다.

 

보는 것은 말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본 것을 말할 수 없는 여성은 '보는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테말라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중학생 시절, 어떤 언니와 함께 숙소로 돌아가던 중 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고 언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차에서 행인들을 보며 자위를 하고 있는 남성과 눈이 마주친 경험이 생각난다. 보통의 여성이 일상의 장소에서 '보이는' 객체로 대해지는 경우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여럿 있을 것이다. 이글은 여성의 시선에 대한 것이니 만큼 여기까지 하는걸로...

 

 

 

시선의 진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여성의 시각적 주체성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전례 없이 여성아이돌이 절대적인 존재감을 펼치고 있는 요즘, 여성팬들이 이들을 보는 방식은 남성팬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성팬들은 그들을 ‘보기도’ 하지만, ‘보이는 그들’을 의식하기도 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이돌들의 '외모', '성격' 등 질적인 측면 그 자체를 보기도 하지만 관중에 의해 찬사받는 존재로서의 그들을 의식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때, 아이돌이 가지는 후자의 정체성은 보는 여성 관객과 연결되고 시선은 돌고 돌아 어느 지점에서는 스스로를 그들에게 대입하게 된다. 그래서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돌이나 연예인들의 모습을 따라하는 모습은 여성들 사이에서 훨씬 빈번하게 발견된다. 아이돌들은 순전히 ‘보는’ 대상으로 남지 못하고 자신의 사적인 삶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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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 이런 여성아이돌의 엄청난 성공에는 여성들의 ‘보이는 자아’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의 주인공 ‘자영’(전종서)은 한 부분에서 ‘우리’(손석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 여자 신음소리가 남자 때문인것 같애? 자기 신음소리에 자기가 흥분하는거야. 진짜로.” 여성은 ‘보이는 주체’로서의 자기자신을 그대로 긍정하며, 오히려 나르시시스트적으로 보는 자아와 보이는 자아와의 거리를 즐기는 것이 아닌지.

 

타인의 시선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이제는 내면화해버린 하나의 시선으로 자신을 유동적으로 객체화하며 주체적으로 쾌락을 얻는게 아닌지 나는 되물었다.


그런데, 모두라고 당연히 할 수 없겠지만, 일부 여성들이 나르시스트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다. 끊임 없이 보는 사람과 끊임없이 ‘보이는 나’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는 사람은 차이를 가진다.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면, 전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가지는 반면 후자의 세상은 온통 '나'일 수밖에.

 

"난 날 사랑하고, 날 즐거워해!"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어딘가 복수같기도해서 나는 이런 나르시시즘이 자연스럽다가도 조금 슬퍼진다. 물론 이는 아직 과도기적 감상일뿐, 여성들이 어디까지 멀리갈수 있는지는 두눈을 크게 뜨고 관찰해보아야지.

 

 

[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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