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운명을 믿으세요? [문화 전반]

시를 즐기는 방법
글 입력 2023.05.1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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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


 

운명을 믿고 싶을 때가 있다. 서가에서 책을 고를 때만큼은 나는 운명론자가 된다. 특히 시집을 고를 때가 그렇다.

 

서점에서 책을 살 때, 그 자리에서 책의 전부를 읽고 책을 사길 결정하지 않는다. 때로 단 한 문장, 단 한 편이, 수많은 우연 속에 필연이라고 믿고 싶은 순간을 만들어서, 시집을 꼭 끌어안고 집까지 오게 만든다. 읽겠다고 결정하는 그 순간마저 꼭 시 속에 나올 것 같다.

 

시집을 읽을 때면, 온몸으로 시가 되는 기분이 든다.


 

 

주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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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이해하는 일은 마치 주파수가 맞아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파수가 맞아야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나의 언어와 경험이 시인의 언어와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시를 읽고 있을 때면, 꼭 종이의 모서리를 만지고 있는 기분이 든다.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팔랑팔랑 손끝을 간질이지만, 예기치 못하게 그 끝에 베이고 만다. 피가 난 손끝을 입에 물고 혀로 누른다. 잊고 살다 어느 틈에 가끔 상처가 벌어지듯 시의 문장은 마음에 스며들어 있다.


내게 시란 참 개인적이고 내밀한 목소리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성을 띠기도 한다.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결핍이 있어서, 저마다의 이유로 완벽하지 않고 나름으로 불우해서 글을 쓴다. 시인들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감각을 해독해 내면에 천착한다. 기민하게 세상의 흐름을 알아채고 가장 먼저 아파 우는 사람들이 시인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나는 시적 표현의 아름다움은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까지는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언어는 참 낯설고 때때로 아름답기까지 한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럴 때는 조금 외로워진다. 각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속삭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시를 즐기는 여러 가지 방법 



책장을 그저 넘길 수도 있지만 그때는 낭독을 해본다. 섬세하게 벼려지고 다듬어진 표현을, 언어를 입에 머금고 혀를 굴려 소리를 내본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며 나는 바람 소리로, 혀 양옆으로 흐르는 부드러운 공기 소리로, 혀끝이 치아 뒤편을 톡 건드릴 때면 느껴지는 미끈한 감촉으로 시를 느껴본다. 소리 없이 시를 즐길 수도 있지만, 시가 노래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떠올리면 이렇게 낭독으로 즐기는 방법도 있다.


시집을 사면 항상 고민이 된다. 통째로 한 번에 읽어볼지, 아니면 때에 따라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볼지. 시간이 되면 통째로 읽어보고, 시간이 안 되면 눈에 들어올 때마다 한 편씩 골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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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째로 읽을 때는 왜 이렇게 시를 배열했는지 추측해 보는 재미가 있다, 시인이 반복하는 이미지들을 살펴볼 수도 있다.

 

한 시집 전체를 한번에 읽어나갈 때면, 꼭 색유리를 눈에 대고 세상을 보는 기분이 든다. 시인의 시선에서 보는 세상은 어떤 빛깔인지 엿보는 기분이다. 가장 내밀하고 소중한 시인만의 공간에 초대받은 비밀 친구가 된 것만 같다.


마음 따라 한 편씩 뽑아 읽는 일은 깜짝 선물의 리본을 풀어보는 것만 같다.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만나면, 하루 종일 행운이 뒤따를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하루 종일 오늘 뽑은 시의 문장을 곱씹다 보면, 슴슴한 일상이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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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는 시집의 제일 앞장, 시인의 말을 보며, 혹은 시집의 제목을 보며 사탕을 하나 골라 입에 넣고 시를 읽는다. 어떨 때는 사탕의 맛과 시가 꼭 들어맞기도 한다. 안 맞을 때가 더 많지만, 그런대로 사탕의 맛과 시의 대비적인 부분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사탕을 입에 물고 시를 읽을 때면 시를 읽는 시간이 아주 달콤하게 느껴진다.

 

 

 

시가 필요한 순간


 

살다보면 시가 필요할 때가 있다.

 

시의 언어가 가진 섬세함만이, 독특함만이, 내밀함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있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과 순간을 만날 때 특히 시가 절실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어루만져야 할 때, 더듬을 용기가 나지 않을 때, 시는 내게로 와서 먼저 소리내어 감정의 세부를 매만지며, 용기를 주고 위로해준다.

 

문학은 무용하다. 문학의 장르 중 시는 가장 무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무용한 시의 힘을 알고 있고, 무쓸모한 것의 쓸모를 안다. 그것은 필요와 쓸모의 세계에서 나를 해방시키고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세계로 이끈다. 그곳에서 명쾌한 해답 없는 의문들을 가로지를 때 우리는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다채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시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당신도 경험해보길 바라며, 최근에 내가 빠진 시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

그리 깊지는 않은 역사를 간직한 

무늬의 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우리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치마는 소리 없이 돌고

돈다는 것은 

돌면서 계속 새로운 무늬를 가진다는 거지


...

치마를 입고 함께 춤을 춘다고 해서

우리의 성이 같아지는 건 아니지만


한때 노동복이었던 

치마를 입은 내가 스코틀랜드에선 

남자여도 이상할 건 없지


...

이 거리에서 우리는 모호하게 기워져있지

깁다, 라는 것은 깊다는 것과 별 관계가 없지


킬트, 그리고 퀼트

그리 깊지는 않은 전통에 대하여

...

 

(주민현, 「킬트의 시대」, 『킬트, 그리고 퀼트』 中)

 

 

[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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