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여행지의 영화관

영화 <빛의 시네마>(Empire of Light, 2022)
글 입력 2023.05.1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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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근처의 작은 도시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다가, 4월 말에는 3박4일 일정으로 베를린엘 잠깐 다녀왔다. 별 계획 없이 생각나는 대로 움직여서 그런가, 마지막 날에는 시간이 붕 떠버렸다.


원래 시간이 뜨면 뭘 하더라. 내가 지금 독일이라는 걸 신경 쓰지 않고 평소의 내가 어떻게 하는지 생각해 봤다. 대부분 카페에 갈 테지만, 안타깝게도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었고, 여긴 한국처럼 늦게까지 여는 카페가 없다. 게다가 노동절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문을 연 곳도 많지 않았다.


카페가 아니라면, 하나 남은 답은 영화관이다. 저녁을 먹다 말고 곧장 주변 영화관과 상영 시간표를 검색했다. 운 좋게도 바로 옆 골목에 영화관이 있었고, 더 운 좋게도 30분 정도 후에 시작하는 영화가 있었다. 그리고 더욱더 운이 좋게도, 그 영화는 마침 내가 보고 싶어 하던 영화였다.

 

 

 

<빛의 시네마>(Empire of Light, 2022)



샘 멘데스 감독에 올리비아 콜먼 주연이라기에 안 그래도 관심이 가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상영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그냥 나중에 노트북으로나 봐야겠다고 생각하려던 찰나에 촬영 감독이 로저 디킨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엔 좀 무리해서라도 꼭 영화관에서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가 베를린에 오기 며칠 전의 이야기이고, 베를린에 온 후로는 영화 같은 건 생각할 틈도 없이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런데 여행 끝물이 되자 당연하다는 듯이 이 영화가 내 눈앞에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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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영국의 한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빛의 시네마>는 오래된 극장에서 일하는 ‘힐러리’가 주인공이다. 그의 무료한 일상은 새로 온 직원 ‘스티븐’의 등장에 점차 분홍빛으로 물든다. 이 설명만 들으면 아주 달콤한 로맨스가 떠오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힐러리는 조현병을 앓는 백인 여자이고, 스티븐은 아들뻘의 흑인 남자이기 때문이다. 인종, 정신병, 나이 차이. 이들이 넘어야 할 장애물은 너무 크고 너무 많다.

 

 

 

흔하디흔하고 귀하디귀한 영화 속 조력자



가장 처음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진 것이 주연 배우인 올리비아 콜먼 때문이었고 영화를 보면서도 그의 연기에 계속 감탄했다지만, 배우가 아닌 ‘영화 속 인물’을 향한 관심은 올리비아 콜먼이 연기한 힐러리도 아니고, 그 상대 역 스티븐도 아니고, 극에 드문드문 나오던 직장 동료들에게 향했다. 


이 조연 무리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틀에 박힌 조력자 캐릭터들이다. 은근슬쩍 주인공 곁에 나타나 주인공을 자극하거나 그에게 힘을 주는 말을 건넨다. 그렇게 제 할 일을 다 하면 또 은근슬쩍 사라진다. 힐러리와 스티븐은 서로 의지하며 함께, 그리고 각자 성장했다. 그러나 그 성장은 조력자들이 아니었다면 싹조차 틔우지 못했을 테다.


그토록 흔한 캐릭터인데도 그들에게 눈길이 갔던 이유는 이들이 말도 안 되게 좋은 사람들이어서다.


백인 중년 여성 힐러리가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으며, 새로 영화관에서 일하게 된 스티븐은 흑인 청년이다. 심지어 영화의 배경은 40여 년 전의 영국. 힐러리와 스티븐이 사내 연애를 하는데 이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또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가 세상을 너무 박하게 평가하는지는 몰라도, 이 조연들의 존재가 판타지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인 요소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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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재밌는 건, 힐러리와 스티븐이 각자 다른 면에서 소수자이듯, 이 조력자들도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안경 쓴 말라깽이, 고스족 사회초년생, 그리고 땅딸막한 고집쟁이 영사 기사. 사람을 외형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영화란 캐릭터의 외형만으로도 많은 것을 가늠케 하는 매체라는 걸 고려해 함부로 말하자면, 이 조력자들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영화 <빛의 시네마>가 히어로 영화였다면 이들이 조력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도 않았고 유별나게 용감한 것도 아니며, 크나큰 희생을 치른 적도 없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한 조력자다. 그들이 순간마다 건넨 작은 손길이 말 그대로 ‘조력(助力)’이 되었으니 말이다. 

 

 

 

흔하디흔하고 귀하디귀한 ‘일상’ 속 조력자



알다시피 우리의 일상은 히어로 영화와 비교해 매우 평화로운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어로 영화에 나올 것 같은 화려하고 거창한 조력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주위를 살핀다면, 손끝이 따뜻해지는 친절을 건네는 일상의 조력자는 종종 마주칠 수 있다. 


베를린에서 보내는 첫 삼일은 정말 평화로웠는데, 마지막 날의 오후 반나절 동안 갑자기 인종차별을 세 번이나 당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인종차별이 특히 불쾌한 점은 내가 그런 일로 불쾌해진다는 사실마저 불쾌하다는 것이다. 그 한심한 사람들 때문에 내 기분이 나빠졌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 없이 꽁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후, 내 기분은 다시 상승곡선을 그렸다.


영화관 건물의 입구를 찾지 못해 행인에게 길을 물었더니 입구까지 직접 안내해 주며 즐겁게 영화를 관람하는 인사를 해주었다. 영화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서는 뒤에 선 관객과 서로 무슨 영화를 보러 왔는지 물어보다가 각자 좋아하는 감독을 추천하고 헤어졌다. 매표원은 내 어설픈 독일어를 듣고 사소한 것까지 다시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이 세 대화를 다 합쳐도 3분이 채 되지 않을 텐데 그 소소하다 못해 사소한 대화가 나를 다시 들뜨게 했다. 그들에게는 기억도 못 할만큼 간단하고 일상적인 일이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상승세를 보이던 내 기분 곡선은 영화를 보고 최고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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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는 영화관에서 오랜 기간 일했으면서도 아는 영화가 없었다. 그러나 작품 후반부에서 힐러리는 뒤늦게 영화와 사랑에 빠지고 영화의 힘을 빌려 성장한다. 그러고는 스티븐을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작품 말미에서 힐러리가 영화를 보고 성장했다면, 내 경우에는 여행 말미에서 영화를 보고 이 여행을 요약하고 마무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인종차별로 힘들어하는 스티븐, 애정 어린 조언으로 힘을 내는 힐러리, 영화를 보고 눈을 반짝이는 스티븐과 힐러리. 예정에 전혀 없던 일이었지만 베를린에서 마지막으로 한 것이 영화 관람이어서 기뻤다. 영화관에 오길 잘했다. 

 

 

 

여행지의 영화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영화를, 여행지에까지 가서 봐야 할까. 여행지에서는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전 세계 어디든 큰 차이도 없을 듯한 어두컴컴한 실내 공간에서 두 시간가량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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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라는 매체의 경험은, 그 영화 상영 시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관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보는 풍경, 들어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 영화관 안에 붙어 있는 다른 포스터, 영화 시작 전 광고, 함께한 관객들, 영화가 끝난 뒤 두어 시간 만에 다시 맡는 바깥 공기까지 섞여 들어 영화의 감상을 완성한다. 


영화 <빛의 시네마>의 러닝타임은 113분이었지만, 나는 베를린에서 보낸 그날 하루 전부를 영화의 감상으로 기억할 것이다. 베를린 장벽을 따라 걷고, 공원에서 책을 읽다 낮잠을 잤다고. 인종차별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친절한 사람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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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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