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그늘

글 입력 2023.05.06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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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제나 내 옆에.


나는 늦둥이로 태어났다. 오빠는 나보다 스무 살이 많았다. 엄마와 아빠는 나보다 오십 살이 더 많았다. 가족과 함께 다니면 오빠가 아빠라고 사람들은 당연히 생각하곤 했다. 어릴 때는 아니라고 나도 소리를 지르며 해명했지만 커가면서 그냥 지나가는 음식점이나 미용실 같은 곳에서는 그러려니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도 아빠처럼 굴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학부모 참여 체육대회 같은 게 있으면 늘 엄마·아빠 대신 오빠가 왔고, 늘 나를 챙겼고, 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주고,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친구들과 놀러 나가기보다는 나를 포함한 가족과 주로 놀았다. 나는 오빠 친구 없지, 하며 늘 놀리곤 했다.


내가 아홉 살이 되던 날, 나는 빨리 열 살이 되게 해주세요- 하고 소원을 빌었다. 나는 빨리 크고 싶었다. 내 소원을 유심히 듣던 오빠는 그날 저녁 나에게 비밀 하나를 일러주었다. 사실 오빠와 나는 스무 살이 아니라 열아홉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나는 거짓말이라고 말했고 오빠는 진짜라고 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아빠가 출생 신고를 늦게 했다고 했다. 내가 ‘왜?’하고 묻자, 오빠는 곤란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오빠는 스물아홉이야?’라고 물으니, ‘아니, 나는 스물여덟이고, 사실 네가 열 살인 거야’라고 말했다. ‘그럼 나도 이제 나이가 두 자리가 된 거네!’ 하고 기뻐하는 나에게 오빠는 ‘그래, 열 살 축하해, 우리 공주’ 하며 10이 적힌 초를 꽂은 조각 케이크를 내밀었다. 오빠와 나는 그렇게 둘만의 비밀 열 살 파티를 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1월 1일, 그러니까 법적으로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오빠는 엄마 아빠 몰래 술을 사 왔다. 이미 일흔에 가까웠던 엄마와 아빠는 늘 일찍 주무셨다. 오빠 방보다 더 넓은 내 방에서 우리 둘은 몰래 소주잔을 부딪쳤다. ‘키야-’ 오빠와 나는 시원하게 마셨다. 목이 따갑고 알코올램프 향이 났지만, 뭐 먹을 만했다. ‘엄마 아빠는 술 잘 못 마시는데 나는 잘 마실 것 같지’, 나는 말했고, ‘나도 잘 마시니까 너도 잘 마시겠지!’, 오빠가 말했다. ‘에이, 오빠랑 나는 다를 수도 있지!’ 하는 내 말에 오빠는, ‘너 미역 못 먹는 것도 나 닮았고, 꽃가루 알레르기 있는 것도 나 닮았고, 어릴 때 사진도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것도 나 닮겠지’, 하고 말했다. ‘그러네, 나 엄마·아빠보다 오빠를 어떨 땐 더 닮은 것 같아, 나도 술 잘 마시면 좋겠다’, 하고 나는 덧붙였다. 내 말에 오빠는 활짝 웃으며, ‘그래도 술 너무 많이 마시는 건 닮지 말고’, 하며 내 볼을 꼬집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오빠는 죽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오 년 뒤였다. 경기도 시골에서 벽지장판 일을 하던 아빠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은 가계가 어려워졌다. 오빠는 아빠가 돌아가신 슬픔에 일 년 정도 힘들어하다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원래 아파트 관리사무소 계약직으로 일하던 오빠는 위험이 큰 대신 현금으로 조금 더 높은 돈을 바로 지급해 주는 공장에 들어갔다. 밤낮없이 일했다. 오빠는 늘 새벽이나 아침쯤 들어오곤 했는데, 그래도 나를 보면 공부는 잘되니, 그래도 넌 알바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오빠가 많이 사랑한다, 이런 말들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오글거리는 말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서 자라고 오빠를 방에 밀어 넣곤 했지만 내심 그렇게 날 생각해 주는 오빠가 고마워 손 편지나 초콜릿 따위를 오빠 방 문고리에 걸어두곤 했는데.


오빠는 그 공장의 기계를 고치려다가 벨트와 장치 사이에 목이 끼어 죽었다. 나 아직 아빠라고 제대로 한 번 불러주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죽었다. 우리 오빠, 아니 아빠는 삼 개월 전에도 똑같은 기계를 고치려다가 갈비뼈를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 똑같은 기계를 고치려다가 삼 개월 후에는 결국 죽게 된 것이다. 어차피 공장에서는 현장 관리 주임만 자르면 된다고, 이런 게 뭐 크게 보도라도 될 것 같냐고 했다. 마음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내 없는 미혼부는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해서 오빠가 된 우리 아빠는, 결국 또 다른 법의 그늘에서 망자가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몰래 나의 열 살, 스무 살을 모두 챙겨줬던 우리 아빠. 평생 아빠 소리 한 번 못 듣고 떠나간 우리 아빠를 위해. 나는 오늘도 법정 앞에 시위하러 간다. 아빠 같은 무고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 아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를 위해.

 

그가 늘 이 자리에 있다. 내 마음속에, 언제나 내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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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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