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백현진의 '모과'와 글쓰기에 대한 단상

모과 향기
글 입력 2023.05.0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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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의 노래 <모과>의 훌륭한 노랫말은 작문과 예술에 관한 아주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진실을 담고 있다.


여느 때처럼 평범한 밤이었어

우리 둘은 공원에 있었지

매우 낡은 정자에 누워서

눈을 감고 밤의 소리를 듣네

그때 모과 냄새가 소리 없이 흐르네

그 냄새는 점점 강해지더니

모과 냄새 서서히 진동을 하네 그러더니

온 사방에 모과 냄새 퍼지네 모과 냄새

그 냄새에 온통 맛이 가네 한순간 우린

정말 다소 과장하면 한순간 정말 모과만 있으면

한순간 완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네

다 필요 없고

모과와 너만 있으면
 


(중략)


모과와 너. 이 가사는 확실히 메타적인 구석이 있다. ‘너’는 화자가 묘사하는 사랑의 대상, ‘모과’는 화자가 그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일종의 장치다. 화자는 밤의 공원에서 사랑하는 너와 함께 누워 모과 냄새를 맡는다. 시간이 흐른 후 모과 냄새는 거꾸로 사랑하는 너가 있는 밤의 공원으로 화자를 데려간다. ‘모과’와 ‘너’는 예술에 있어 필수적인, 어쩌면 유이한 두 개의 항이다. 무엇(너와의 밤)을 어떻게(모과 냄새) 다룰 것인가?

 

예술에 있어 중요한 것은 ‘너’가 아니라 ‘모과’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은 사고 구조의 투명한 반영이 아니고, 사실의 정직한 재현이 아니다. 글 쓰는 사람은 언어가 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최초의 순간과 마침내 그것이 구체화되어 종이 위에 자리 잡아 독자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사이에 모과 향기를 불어 넣어야 한다. 물론 이 모과 향기가 단순히 수식적이고 형용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재배치와 재조합의 문제에 가깝다. 글은 무엇보다 즉물적인 의미에서 글자들의 조직이다.

 

*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또 소설가 스티븐 킹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뮤즈를 기다리지 말고, 대신 뮤즈가 몇 시까지 오면 되는지 알려줘라.”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서 하는 말이다.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내가 현재 봉착해 있는 문제도 이것과 비슷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라며 소위 말하는 ‘글감’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과거에 영화에 대해 글을 썼을 때는 글쓰기의 소재(대상이 되는 작품)가 저절로 주어졌다. 그러나 비평 형식의 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이후 자유로운 에세이의 세계로 온 나는 ‘어떻게’ 쓸지 이전에 ‘무엇’에 대하여 쓸지 고민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글의 소재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영화나 책에 대해 글을 쓰던 시절과 비교하면 도성을 나와 칼 한 자루 차고 황야에 나온 기분이다. 에세이적 글쓰기는 훨씬 자신만의 콘텐츠로 승부를 봐야 하는 측면이 강하다. 총선에 출마한 전 총리의 마음이 대충 이런 것 아니었을까 싶다.

고민 끝에 자문해본다. 그렇다면 ‘글로 쓸 만한 소재’의 기준은 무엇일까? 극적인 요소, 특이성, 개인적인 의미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소재 자체가 ‘글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딜레마가 있다. 너무 조밀하고 완결적인 대상/이벤트는 나 자신의 이야기나 상상력이 틈입할 공간이 없다. 또 ‘글로 쓸 만한 소재’라는 판단에는 기존에 봐온 글 들에서 본 것 같은 무의식적인 기시감도 한몫한다. 따라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글감은 오히려 글로 풀어 쓰게 되면 처음보다 덜 흥미로워질 때가 많다. 모두가 영화 같다고 하는 이야기를 정말로 영화로 만들면 뻔하고 재미없는 결과물이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결론은, 소재를 찾아다니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것을 머리로는 안다. 노래 <모과>를 들으며 이러한 일련의 생각들이 들었다. 요즘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질까 하는 고민을 하는 와중에 가까운 사람이 그렇다면 글쓰기의 어려움에 관한 글이라도 써보라고 해서 결국 푸념만 한 바닥을 늘어놓았는데, 나름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기도 하고 고민만 더 가중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what이 아니라 how라는 케케묵은 사실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


<모과>의 노랫말에서 특히 훌륭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예술이 현실에 가하는 은은하면서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작용을 ‘향기’라는 단어로 함축한 점이다. 이 향기라는 단어는 창작물의 향유 과정 뿐만 아니라 제작과정에도 어울린다. 글 쓰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필자로서의 자의식과 자연스러운 단어 선택, 문체 등은 결국 향기처럼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삶의 감각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문체(文體)라는 것은 말 그대로 글의 몸-소설가의 신체와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종이 위에서의 방황은 단지 지금의 내 현생에서의 방황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노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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