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장 듣고 싶은 말, 라이스보이 슬립스 [영화]

세상의 이방인들을 위로하며
글 입력 2023.05.0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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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익숙한 한국 땅을 떠나 다른 곳에서 터전을 잡는다. 꿈, 직장, 결혼, 기타 등등 각기 사연도 다양하다.

 

1990년, 소영과 동현 모자도 캐나다로 떠나왔다. 국내에선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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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당연하게 쓰던 한국어는 도움이 되지 않는 머나먼 이국의 땅. 오직 짧은 영어와 마음가짐 하나로 소영은 하루하루 고군분투한다.

 

그녀는 강하다. 강해지려고 한다. 동양인 여성이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주눅이 들 수는 없다.

 

아무렇지 않게 성추행하는 직장의 백인 남성에게 그녀는 다시 한번 이런 짓을 했다간 죽여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그 한마디를 하기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는, 처음엔 제자리로 돌아가 서성이던 그녀의 뒷모습과 지켜보던 또 다른 여성들의 불안한 시선을 통해 알 수 있다.

 

아이가 학교에서 먹을 점심 메뉴를 '다른 애들이' 먹는 것과 같은 걸 싸달라고 할 때도 그녀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작 밥 때문에 아이가 어떤 소리를 들었을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것 같으면서도 내색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마음이 무너져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없을 테니까. 동현을 더 나은 환경에 안착시키기 위해 학교라는 곳은 절대적인 장소였다. 다만 소영은 말한다. 누가 괴롭히거든 "Do you know 태권도?"라고 말하며 한 대 갈겨버리라고 말이다.

 

물론 그녀의 조언이 올바른 것은 아니다. 또래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동현이 정학 처분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소영은 동현의 행동이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었으며, 다른 아이들이 동현에게 행사한 정서적 폭력은 왜 처분받지 않냐고 분개해 한다. 그러나 백인 교장은 유감을 표하는 척 외면하고 말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 흘리는 아이에게 더욱 단호하게 말한다. 잘못한 것 없으니 울지 말라고, 남자는 태어나서 딱 3번만 우는 것이니 절대 약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결코 호의적인 적 없는 자신의 인생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아이의 인생을 위해, 소영은 언제나 꼿꼿하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살다 부러질지언정 갈대처럼 흔들리기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작은 기대가 하나쯤 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오픈카를 타고 긴 머리를 휘날리는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이다. 그러나 아이가 청소년이 되어서도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하나뿐인 가족이 이제 자신과 데면데면하게 구는 데다가, 허리 통증으로 찾아간 병원에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언제나 홀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했기에,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 기대 한 번쯤 쉴 수 있길 원했을 것이다. 다정한 한마디를 건네 줄 누군가를 갈구했으리라.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사이먼은 소영이 그토록 바랐을 그 누군가이자 마지막 희망이 된다. 찌개를 먹을 줄도 알고, 제 아들을 살뜰히 생각해 줄 줄도 안다. 손님이면서도 집안 살림을 함께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자상한 사람이다. 그가 말한다. 당신과 집을 합치고 싶다고. 당신과 살고 싶다고. 소영의 상태를 알게 된 때에도 사이먼은 말한다.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고, 꼭 함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춤을 춘다. 아주 느리고 서툴지만, 애정 가득한 움직임이다.

 

함께 있을게. 떠나지 않을게. 당신의 아이를 내 자식처럼 대할게. 언제나 간절했던 그 말을 듣게 되자, 소영은 외면하기 급급했던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죽은 남편과의 기억은 그녀의 삶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아픈 상처였지만, 사이먼의 존재에 힘입어 비로소 흉터가 되었다.

 

엄마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자 옆에 두고 싶었던 이, 그리고 낫지 않는 상처를 치료해 줄 약.

 

사이먼이라는 캐릭터를 감독 그 자신이 직접 연기함으로써 그 의의는 더욱 커진다. 모든 이방인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작은 위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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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순수하다. 그래서 잔인하리만치 솔직하고, 자신들의 호기심이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잘 모른다. 개미를 밟아 죽이고 꽃잎을 떼어내듯, 자신들과는 다른 동현을 놀이 삼는다.

 

유년기의 기억이 큰 상처로 남은 동현은 청소년이 되어서도 고통받는다. 그 자신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언제나 앞을 보고 사는 엄마는 그 어떤 과거의 단서도 말해주지 않으니, 동현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안정을 찾기보다 남들과 같은 외양을 갖고 그들과 어울리기를 선택한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에 파란 렌즈.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동현의 표정은 비참하기만 하다. 이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학 기간 엄마와 함께 방문한 고향 땅이 너무나도 특별하다. 비록 친척들이 대단히 자신을 반겨주진 않더라도, '나'를 드디어 찾아냈다.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변하는 화면비와 평온하고 따뜻한 색감이 그 증거다. 거기서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일 필요도, 새파란 렌즈를 낄 필요도 없다. 오히려 머리를 빡빡 밀고 아빠의 낡은 군복을 입으니 한층 자신감이 붙는다.

 

생전 처음 보는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보여주는 애정은 동현이 꼭 필요로 하던 것이다. 그 어떤 의문도 없이 단번에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없던 경험일 테니 말이다.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근간을 찾게 된 동현은 거기서 어머니의 비명도 듣는다. 언제나 무시받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살던 당신이 속에 꼭 숨겨 둔 나약함이다. 동현은 하염없이 악을 지르는 어머니의 마른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조용히 서있는다.

 

동현은 또한 이 비명도 꼭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어깨를 그녀에게 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혼자이지 않았다고, 나도 당신의 곁에 있다고 그녀를 위로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드디어 처음으로 이해한다.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큰 결심이었을지 동현은 몰랐을 테니까. 언제나 그렇듯, 이해가 가장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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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수많은 동현들은 제 안에 부는 혼란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흔들렸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인종들 속에서 내색하지 않고 어울려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나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에야 이들은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다. 외롭더라도 흔들리진 않는 사람이 된다.

 

라이스보이 슬립스. 무수히 많은 밤을 자고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너는 데이비드일 필요가 없다는 걸 알거야. 케빈도 아니고, 리처드도 뭣도 아니야. 잘 자라 나의 라이스보이, 그래도 행복한 꿈을 꾸기를. 영화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유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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