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하고, 아름답고, 죽는 [도서/문학]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2015)
글 입력 2023.04.2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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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나 성경에 따르면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새삼 창조론의 참과 거짓에 대한 논쟁을 여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무수한 무언가를 만들어냈듯 인간을 만들어낸 조물주가 존재한다는 발상 자체의 흥미마저 애써 멸균할 필요는 없을 테다.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물질로 몸을 빚고 숨을 불어넣어 움직이게 된 존재다. 신화의 사실성에 대한 과학적 입증과는 별개로, 어쨌든 인간을 구성하는 여전한 두 가지는 몸과 숨이다.

몸과 숨으로 구성된 모든 인간은 욕망의 존재다. 인간은 숨을 통해서만 움직일 수 있으므로 인간에게 숨=동력이라는 공식이 설정된다면,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불어넣은 숨의 정체는 욕망이 아닐까. 이 의심에 기대어 거칠게 말하자면 인간은 욕망이 갇힌 유기물 덩어리다. 무한한 욕망을 절제하는데 성공하면(혹은 했다고 믿으면) 삶이 되지만, 욕망을 기필코 숨기지 못(안)한다면 서사가 된다. 인간의 욕망은 다채롭게 변주되어 무수한 이야기로 다뤄진다. 다만 가장 원초적 욕망을 유기물 덩어리째로 꺼내는 이야기는 희귀하고, 난감하며, 강렬하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2015)를 읽는다.
 
 
 
욕망을 다루는 신


‘나’는 화집에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유심히 보고 있다. 감상보다는 관찰에 가까운 태도로 화폭에 담긴 죽음의 순간을 분석하던 나는 “한 인간의 내부에서 대립하는 이 모든 감정들”(8쪽)을 죽은 마라의 표정을 통해 구현한 다비드를 향해 찬사를 바친다. 예술가의 덕목처럼 격정을 경계하며 “건조하고 냉정할 것”(같은 쪽)을 다짐하는 그는 현실에서 죽음을 ‘창작’하는 가이드다. 그는 “인생에 대한 아무 의미 없는 언급들”(11쪽) 속에서 고객이 될 가능성을 가진 누군가, 즉 삶에서 “충분히 절망”(13쪽)하여 죽음에 이끌리는 사람을 찾는다.

‘나’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자신의 작업의 목적을 은밀히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죽음을 원하는 의뢰인을 찾아 죽음을 선사하는 시혜적 작업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스스로 “신이 되고자”(15쪽)하는 열망이 발현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타인의 소망과 주체의 열망이 죽음을 매개로 호혜를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소설은 달콤한 어지럼증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신이 되기를 원하는 이는 왜 죽음을 도구로 선택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앞서 말했던 숨=욕망의 도식을 다시 펼치고 욕망의 영역을 살펴야 한다.

조물주 신은 인간을 만들고 욕망을 불어넣었다. 물질을 결합해 육체를 만들고, 욕망을 통해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 전통적 신의 모습이다. 반면 태생적 한계로 인해 인간은 물질로 인간을 빚을 수 없지만, 인간 안에 내재된 욕망을 끌어낼 수는 있다. 따라서 신이 되려는 인간은 적어도 욕망을 다루는 가장 섬세한 기술자(예술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들 중 가장 거대한 욕망 중 하나가 타나토스―죽음충동이다. 유기체 인간이 무기물로 회귀하고자 하는 이 원초적 욕망은 ‘움직이게’ 하려는 신의 일차적 의도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멈추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다. 죽음충동이 피조물 인간에게 심어놓은 창조자의 은밀한 유희인지, 혹은 실수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다시 무기물로 순환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인간만의 의지인지도 모른다. 다만 “누구도 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 수는 없는 법”(15쪽)이므로, 그 문제는 차치한 채로, 우리는 신이 되려는 인간의 섬뜩한 유희를 은밀히 지켜볼 뿐이다.

죽음의 계약을 이행하는 ‘나’의 태도는 개입보다는 관찰에 가깝고, 강력한 구원자보다는 초연한 인도자에 가깝다.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방관하는 신의 전형성을 닮은 나는 고객과의 계약이 성공적으로 종료되면 여행을 떠나고 글을 쓴다. 죽음의 욕망을 끌어내는 정교한 작업을 마무리한 후 “고객과 있었던 일을 소재로 글을”(15쪽) 써서 기록하는 그의 행동은 마치 신의 명령으로 쓰인 경전처럼 선명한 간증을 남기게 될 테다. 어떤 종교의 완성은 신이 행한 기적을 전달해줄 기록을 통해 이뤄지므로, 죽음의 욕망을 불어넣는 ‘나’는 곧 새로운 신들의 전당에 오를(혹은 이미 올랐을) 수 있을 것. 치명적인 신의 세련된 권능의 기록을 따라 우리는 이제 호흡하는 욕망의 이야기로 눈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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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와 뮤즈의 욕망


죽음을 다루는 소설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드러내는 첫 번째 욕망은 성애다. 인간의 육체 속에 불어넣어진 첫 번째 욕망 에로스는 특별한 의미 없이 자주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섹스를 통해 나타난다. 생에 대한 긍정과 사랑의 요구. 살아 움직이라는 조물주의 뜻에 따라 인물들은 정념적으로, 혹은 충동적으로 부지런히 살을 맞대고 육체를 섞는다. 죽음충동의 맞은편에 놓인 이 생명의 욕망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소설은 우선 욕망의 층위 전체를 아우른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K는 어머니의 장례 마지막 날 형의 집에서 “그냥 여자. 괜찮은 여자”(20쪽) 유디트와 섹스를 한다. C는 자신의 동생 K와 “거실에서 섹스를 하고 있”(19쪽)던 바로 그 여자에게 끌려 관계를 맺는다. 유디트는 “그냥 게임”(35쪽)처럼 형제 사이를 부유한다. 세 인물은 각자 자신의 에로스적 욕망에 터무니없이 솔직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행위는 흘러나오는 사랑의 욕망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기보다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욕망을 들이킨다는 느낌이 들 만큼 위태롭다. 실제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인간의 전형을 거부하는 실존적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행위 아래에는 어떠한 상처가 배음처럼 깔려 있다. 그들의 섹스는 대체로 “지루한 표정”(36쪽)을 짓는다.

고대 이스라엘 여걸의 이미지에서 “세기말적 관능만을 남겨”(19쪽)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속 ‘유디트’를 닮은 세연은 진실이 모호한 인물이다. 그녀는 항상 ‘추파춥스’를 입에 물고 있는데, 그녀의 입을 막는 이 끈질긴 저작은 내면의 감정과 진실을 바깥으로 꺼내지 않으려는 결의처럼 보인다. 이는 삶의 어떤 순간부터 그녀를 “믿지는 않았던”(89쪽), 그리고 그녀가 믿을 수 없었던 세상에 대한 비탄이었을 것. 이미 생의 모든 욕망을 소진한 그녀는 “하얀 눈과 얼음만 있”(46쪽)는 차가운 북극을 꿈꾸며 “한없이 지루해졌음 좋겠”(47쪽)다는 바람을 내비친다. 그녀의 육체는 뜨거운 민족의 열망과 거룩한 각오가 거세된 클림트의 화폭 속 유디트의 현현이다.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49쪽)한다고 믿었으므로, 자신을 죽임으로써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기 위해,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욕망을 추동해 줄 죽음의 신을 찾는다.

한편, 유미미는 다른 종류의 욕망에 천착한다. 비디오아티스트인 C가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구상하던 중 만난 행위예술가 유미미는 C로 하여금 그녀를 “자신의 프레임 속에 포획하고 싶다는 거역할 수 없는 충동”(99쪽)을 불러일으킨다.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취해”(106쪽) 예술에 완전히 몰입하는 미미는 모두에게 “반딧불처럼 형형하게 빛이 나”(같은 쪽)는 예술의 여신처럼 보인다. C에게 예술적 욕망의 여신(뮤즈)가 된 미미이지만,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열정적으로 작업을 하면서도 어떤 회의감 속에서 고뇌한다. 그녀는 여전히 예술을 통해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대면하고자 하는 욕구”(108쪽)를 완벽히 해갈하지 못했던 것. 그녀는 살아있고, 아름다워야 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평생 동안 거부했던”(125쪽) 최후의 방식―프레임 속에 자신의 예술을 담기―을 통해서도 그 절실한 욕망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욕망을 채울 방법을 더는 찾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동력을 잃은 그녀는 결국 아늑하고 포근한 “죽음의 냄새”(125쪽)를 다시 찾는다.
 
 
 
죽음의 강 앞에서


유디트, 그리고 미미와 모두 연결된 C는 소설 속에서 가장 활력적인 인물이다. C는 유디트와의 섹스를 통해 생명의 욕망을 확인하고, 미미와의 작업을 통해 예술적 욕망과 감응한다. 이처럼 충분한 욕망을 느끼며 살아 움직이는 C이지만, 반대로 그가 조우한 여자들은 모든 욕망이 소멸된 채 죽음의 신을 향해 간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비극적인 중간자이기도 한 C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 기존의 신과 새롭게 등극한 죽음의 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제처럼 보인다.
 
 
세계와 자신, 오브제와 렌즈, 그가 만나왔던 여자들과 자신, 그들 사이에 놓인 강을 결코 좁히지 못할 것이라는 비감한 절망이 몰려들었다.
 

C는 나의 욕망과 당신의 욕망 사이에 “결코 좁히지 못할”(112쪽) 강이 있음에 절망한다. 아직은 “그의 세계, 그에 의해 창조된, 그에 의해 반영된, 그에 의해 포획된”(112)쪽 프레임의 세계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는 C의 고백은 죽음을 대하는 초연한 ‘나’의 모습과 대비된다. C의 눈앞을 가로막은, ‘그들’이 먼저 건너간 강이 ‘약속된 축복의 땅(가나안 혹은 천국)’ 앞에 흐르는 요르단 강인지, ‘영원한 망각’의 문턱에 흐르는 레테의 강인지 살아서는 영원히 알 수 없을 테다. 다만 C의 ‘비디오’와 나의 ‘글’은 정확히 동일한 역할로 오래 남아 욕망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욕망을 욕망하는 이야기는 계속 흐를 것이다.

만약 신이 인간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은 욕심이 많은 존재다. 그런 신을 닮은 인간 역시 욕망의 존재다. 그래서 태초에 욕망이 있다. 욕망은 그 면면도 다양해서 그것은 당신을 가지고픈 욕망(에로스)이 될 수도 있으며, 끝없이 예술을 탐닉하는 갈증(뮤즈)이 될 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욕망이 인간의 삶에 더는 어떠한 동력도 전달할 수 없을 때, 어떤 육체는 무기물적 욕망을 향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25쪽) 나아간다. 그곳이 욕망이 갈 수 있는 궁극이라면, 죽음의 욕망은 내 삶을 온전히 내 것으로만 가지려는 완전한 소유의 욕망에 가까울 테다. 완전한 욕망은 언제나 인간의 무한한 동력이자, 훌륭한 이야기의 최고급 질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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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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