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묘한 삶의 색 [음악]

글 입력 2023.04.27 13:3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 희망의 조각



태동하는 생명들의 기운이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는 요즘의 시기에, 가끔씩 떠올리는 회화 작품 하나가 있다. 작품 하나가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거나 하는 정도도 아니고, 워낙 유명해서 꼽아보기 살짝 민망한 감도 있지만. 아무튼 좋아하는 마음은 나의 것이니 고백하자면,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라는 작품을 꽤 좋아한다.

 

이 그림을 처음 접한 건 중학생 때 고흐의 일생과 작품을 잘 엮어서 정석적으로 설명해놓은 책을 읽으면서였다. 고흐가 동생 테오의 득남을 축하하기 위해 그렸다는 '꽃 피는 아몬드 나무'는 그가 매우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던 때에 그려졌다고 한다. 실제로 그림이 그려졌던 해당 연도의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림 속 불길한 밀밭 위를 나는 까마귀, 이지러진 별빛에 그의 우울과 혼란이 처절히 담겨있다.

 

하지만 이 아몬드 나무 그림에는 너무나도 단정하고 선명한 생기가 가득하다. 튼튼하게 결이 진 가지, 톡 터지듯 개화하는 작고 흰 꽃망울들과 밝고 푸른 대기. 그림 속의 하늘은 마음이 확 트이도록 상쾌한 푸른색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토록 마음 깊이 박힌 것은 고흐의 우울한 말년에도 생명력의 극치인 꽃나무 그림이, 그것도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기뻐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꽃나무 그림이 남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한 사람이 무언가에, 안팎으로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휩쓸려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을 느끼면서도 누군가를 축하하고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다. 촘촘한 우울과 그를 악화시키는 여러 현실적 문제들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다가오는 봄을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이 좋았다. 숨을 쉬는 한 언제가 되었든 개화하는 봄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은 생겨날 수 있다.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아몬드 나무 가지와 꽃을 떠올리면, 나는 항상 희망의 냄새를 맡게 된다.

 

심심풀이로 집어들었던 책 한 권은 이렇게 긴 시간을 두고 만지작거릴 수 있는 희망의 조각을 만나게 해주었다. 슬픔과 고통의 터질 듯한 압력 속에서 꾹꾹 눌려 빛나게 된 이 조각은 사실 삶을 직시하고 살아내는 모든 이들의 궤적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조각 하나를, 생명력의 힘을 역설하며 나로 하여금 고흐의 아몬드 꽃을 다시 떠올리게 한 조각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심규선의 새로운 싱글, '페리윙클 블루'(Periwinkle Blue)'다.

 


[크기변환] [포맷변환]FueGhkEagAAnP95.jpg

 

 

 

2. 파랑과 보라, 우울과 신비로움 그 사이에



지난 4월 24일 발매된 심규선의 'Periwinkle Blue'는 ep 앨범 '소로' 이후 약 1년 6개월 만의 신보다. 짧지 않은 공백이지만, 사실 그동안의 행보는 밀도 높았다. 3개의 OST 참여는 물론, 심규선은 지난 해 10월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며 발매 당시 팬데믹의 여파로 오프라인에서 선보일 수 없었던 '월령:上', '월령: 下', '소로' 앨범 수록곡들의 무대로 관객들과 호흡했다.

 

또한 활발했던 활동과 별개로 심규선은 음유시인이라는 별칭을 가졌을 만큼 손수 선율과 가사를 수놓듯 적어내려가는 싱어송라이터이기에, 그 공백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정성스런 메세지를 다듬어가는 시간임을 알기에 그의 새로운 선율을 기다리는 일은 기대로 가득하다. 이번 신보 역시 그런 설렘 가득한 기대에 응답하듯 사랑스러운 메세지를 품고 나왔다. 앨범 자켓 속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페리윙클 블루색 꽃, 과연 이 꽃은 어떤 선율을 품고 피어났을까. 곡에 담아놓은 마음을 항상 편지를 쓰듯 설명하는 심규선의 앨범 소개를 잠시 살펴본다.

 

 

사전은 이 색깔을 푸른빛에 자주색이 섞인 색이라고 설명하는데, 나는 쓰고 부르는 사람답게 이 색을 제멋대로 사람에 투영해 보았습니다. 우울을 상징하는 블루에 신비로움을 뜻하는 퍼플이 겹친 이 색깔이, 어쩌면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과도 매우 닮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돌이켜보면 우리들의 봄도 늘 그렇게 여러 겹의 색깔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소란스레 피어나는 와중에, 그 개화를 반기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우울이 꽤 오래 우리 안에 있었을지도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내일을 매도罵倒한 적이 있었는지요. 당신은 아무리 답답한 현재에 갇혀 있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내일에 대한 신비로운 예감들을 믿어왔습니다.

 

심규선, 'Periwinkle Blue' 앨범 소개문 중 일부 발췌

 

심규선에게 페리윙클 블루는, 때때로 우울하고 좌절하면서도 내일에 대한 오묘한 믿음을 가지고 지금을 꾸려가는 우리 모두의 삶의 색이다. 마냥 기쁘기만도, 마냥 슬프기만도 할 수 없는 삶.


 

우리들의 봄은 늘 그렇게 여러 겹의 색

봄은 마치, 향기로운 폭력처럼 내게 와

그렇게 울고도 또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니까

 

 

한없이 실의에 빠져 겨울잠에 들었다가도 봄과 함께 눈을 뜨면 어딘가 말끔해지고 개운해진 느낌이 들며 약간의 의지가 살아난다. 이 의지는 어떨 때는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폭력적인 희망고문 같다가도, 또 다시 기대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달콤한 향기로 다가오기도 한다.

 

비탄 속에서도 다가온 봄을 잡아챈 고흐처럼, 그렇기에 그의 아몬드 나무가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처럼, 우리의 삶은 기쁨과 슬픔, 우울과 행복, 좌절과 의지가 다발로 엮인 것이기에 더욱 다채롭고 아름답다. 그 어떤 순간도 영겁이거나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심규선은 그 자체로도 감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재즈틱한 피아노 선율과 목관 악기 같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로, 또 음유시인답게 다정하고 섬세한 가사로 그 사실을 노래한다.

 

삶을 무한히 긍정하거나 낙관하지도 않고, 또 굴곡과 어두움에 지나치게 집중해서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지도 않는, 단단하고 담담한 삶에 대한 응시. 그의 시선이 이토록 또렷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실 한 순간의 일이 아니다. 심규선의 음악을 오래 전부터 들어온 팬들이라면 눈치챘을 수 있겠지만, 그의 음악적 행보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알면 이번 곡의 메세지가 더욱 진실되게 다가온다. 그 변화는 어떤 형상일까.

 

 

 

3. 더욱 단단해진 꽃



심규선의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음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만, 사실 '힐링'과 같은 테마로 압축하기에 그는 꽤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의 음악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특징을 물었을 때 '아라리', '화조도'와 같은 곡들의 동양적 테마, 한의 정서 등을 떠올리는 청자들도 있을 것이고, 혹은 '데미안'이나 '오필리아', '폭풍의 언덕'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 착안해 서양적 분위기를 가진 곡들을 오히려 먼저 떠올리는 (필자와 같은)청자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초기 앨범들 다수와 '몸과 마음', '환상소곡집' 시리즈 앨범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선율 속에서 사랑을 둘러싼 섬세한 감정선을 담아낸 곡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물론 이 시기에도 '피어나', '너의 존재 위에'와 같이 강한 위로의 힘을 담은 곡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거친 삶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치유라기보다는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는 달콤함이 초중반 앨범들의 주된 정서라고 읽어내도 큰 무리는 없다는 뜻이다.

 


[크기변환] [포맷변환]EnU-MzGXEAEg0z3.jpg

 

 

그러나 '월령' 시리즈를 기점으로 낭만적 선율 위에 더욱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색채가 입혀지기 시작한다. 가령 '창백한 푸른 점'은 사회적 메세지가 가시적으로 드러난 곡으로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이 지구 위에 온갖 재해와 가난, 질병이 들끓고 그 속에서 분열과 분노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접적인 노랫말로 지적한다. '생존 약속'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말 것을 약속해달라고 가감없이 내뱉는 곡이다. 앞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하는 타이틀곡 '월령'까지, 이 앨범은 전반적으로 심규선의 음악들 중 전례없이 결연함에 차 있다. 

 

이후 발매된 '소로'는 보다 부드러워졌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메세지는 결코 무르지 않다. 타이틀곡 제목인 '밤의 정원'처럼, 심규선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으나 그것을 알아보기 어렵게 세상은 어둡고 또 세상은 어두우나 아주 세심히 살펴보면 정원 속의 꽃과 나무들을 알아볼 수 있음을 노래한다. 필연적인 고통과 끝,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것들을 노래한다. 한번 어둠을 알고 그 어둠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한 시간이 있었기에, 그의 노래는 단단한 메세지를 품고도 부드러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심규선은 '월령', '소로'의 곡들을 다수 선보였던 지난 단독 콘서트에서 자신이 여러 일들을 겪으며 예전에 비해 '해야 하는 얘기'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는 소감을 밝힌 바가 있다.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곧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듣기까지 용기가 필요한 이야기들을, 회피해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심규선의 음악적 변화는 진실되고, 그래서 힘이 있다. 그의 노래는 이제 해야 하는 이야기를 보다 확실히 담아내며 우리로 하여금 들어야 할 이야기들을 듣게 한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이번 싱글을 살펴본다. 활짝 핀 페리윙클 블루색 꽃과 봄. 이런 류의 모티프는 지금껏 심규선의 곡에서 여러 차례 등장해왔다. 하지만 특히 이번에 사용된 꽃의 이미지는 그가 최근 앨범들에서 쌓아왔던 삶에 대한 메세지를 가장 응축시켜놓은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한 송이는 사랑과 낭만의 상징이기 때문이 아니라, 피어나기까지의 인고의 과정을 잊게 만드는 아름답고 오롯한 결과물이 아니라, 파란빛이기도 보라빛이기도 한 색을 가지고 '끝끝내' 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의미있다.

 

밝은 빛에 필연적으로 공존하는 어둠을 확실히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삶의 끈질김을 담고 오묘하게 피어난 꽃. 심규선의 선율은 한층 단단해졌기에 한층 더 다채롭다.

 

 

[황수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