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증오하는 V에게

글 입력 2023.04.22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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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랜만이다. 이런 걸 두고 정말 오랜만이라고 하는 걸까. 잘 지내고 있니. 내가 아는 너는 이 질문에 매번 답이 다채로웠는데, 여전히 다채로우려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너는 감각이 뛰어난 애였으니까. 녹슬지도 않는 그 감각. 탐까지 나는.


다른 사람들 보다 훨 예민하고 섬세했던 네 다정함은 전부 그 미세한 감각에서 시작된 말들과 목소리로 이뤄진 따뜻함이었는데, 어떻게 나한테는 그렇게 둔할 수 있었던 건지 궁금해. 다른 사람들한테는 날 선 감각으로 다정하게 굴어놓고 나한테는 내가 싫어하는 행동이 뭔지조차 모르는 척 굴었잖아. 모를 리가 없는데. 다 알면서 부러 그랬던 거겠지.

 

왜 그랬을까, 아직도 궁금해. 야, 나 갑자기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이 몇 마디에 새벽 2시에도 흔쾌히 달려간 적도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다 너를 두고 어딘가 이상하다며 조심하라 내게 타이를 때도 나는 널 감쌌는데. 모든 사람이 다 나더러 정신 좀 차리라고 잔소리했을 때도 너는 내 선택들을 응원했는데. 분명 그랬었는데, 왜 우리는 멀어지는 것도 모른 채 멀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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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끝나면 아르바이트 가느라 바쁜 날들이 태반이었지만 나는 결코 4,500원짜리 커피도 한 번 마음 놓고 사 마신 적이 없었어. 한 피스에 만 원이 넘는 비싼 초밥도 먹어본 적이 없었고, 한남동 근처의 감성 있는 카페에서 케이크를 먹어볼 일도 없었겠지. 네가 아니었다면.


반쯤 눈이 감긴 채 마시던 새벽의 핸드드립 커피도 네가 아니었다면 마셔보지 못했을 거야. 생계를 꾸리는 데에 한나절을 꼬박 쓰던 나에 반해 슬라이딩 퍼즐 같던 네 하루는 내 것과 너무 달라서 시차가 느껴지곤 했어. 이른 낮을 새벽으로 당겨오고, 늦은 밤을 대낮으로 미루고, 아침을 늦은 오후에 즐기는 그런 하루. 자꾸만 뒤바뀌고 맞춰지던 너의 24시간. 잠이 쏟아지면 곤란한 상황들로 가득했던 내 하루와는 다른 시간대의 사람과 삶. 그래서 너랑 있을 때면 나는 자주 나른했다.


나른한데 촉박한 듯도 싶고, 여유롭기도 하고. 시간을 그렇게 자유롭게 쓰려면 보통의 삶은 잠시 미뤄두고 잔고도 충분해야 하는데, 나는 잔고가 충분하지 않았잖아. 수면잔고도, 체력잔고도, 통장잔고도. 내일은 분명 오는데 내일이 없듯이 느릿하게 보내는 새벽은 너무나도 이질감이 들었어서, 정말 현실이었나 의심 가기도 해. 그렇게 우리 많이 늘어졌었는데.

 

아직도 참 고맙다고 생각해. 내 생에 너와 연이 닿지 않았었다면 겪지 못했을 일들이 참 많았으니까. 내가 깎여나갈지라도 다른 사람을 지키는 법을 나는 덕분에 배웠다. 글도 네 덕분에 쓰잖아. 내 문장을 응원해 준 적은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정확히는 우리 둘 다 우울했던 시절에 만나서 서로의 문장을 너무 깊이 끌어안으며 읽었던 탓이지만, 원래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잖아. 네가 울분에 목 놓아 울 때 나는 악에 받쳐 있었으니까.


눈물도 화도 많았던 우리의 청춘은 어쩌다가 이렇게 부서진 걸까. 침 흘리며 울다가도 데킬라 1잔에 춤을 추던 날들은 어디 간 걸까. 아직도 손에 묻은 게 레몬즙인지 소금인지도 모를 정신으로 걷던 길은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그 술집 나무문만 밀고 나오면 놀이터 있는 공원이랑 젤라또 카페 있었잖아. 근데 이상하다. 함께 나부꼈던 날들인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내 앞의 길만 보이고, 그 길 위에 너는 없어. 아니면 너는 계속 옆에만 있던 걸까. 이렇게 될 줄 알기라도 했니.


본래 인생은 마디로 기억된대. 열받게도 내 짧은 마디 하나는 주황색 불빛 아래 소주를 마시던 날에 시작해서 데킬라로 끝나. 그날'부터'는 아니야. 중간에 빠진 순간들이 무수히 많거든. 너에 대한 기억은 데킬라 마시던 여름 한참 지난 겨울밤인지 여름밤인지도 모르겠는 버스 정류장에서 끝나고.

 

네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닐 거야, 아마. 다만 둘 다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 너무 느리게 멀어져서 멀어지는 것도 몰랐던 것 같아. 멀어지기를 원한 건 아니었을 테고 아니기도 했지만, 선택하지 않았다고도 말 못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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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끝으로 더없이 다정했던 네 언어만을 기억하려고 해.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진만 빠지고 힘든 일이야. 미워하는 사람은 표정이 안 좋잖아. 얼굴이 안 좋으면 밉상이 되는 법이고. 나는 미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이해해 주길 바랄게. 네 혀끝에서 떨어졌던 습한 말들이 내 속에 얼마큼의 습기를 꼬아냈는지 너는 모르잖아. 나는 내내 널 감쌌고 아직도 널 감싸는데, 너는 나를 뜯어냈잖아. 이 정도면 선처야.


비록 네 맑던 모습만을 떠올리려 노력한다고 해도, 원래 머리랑 마음은 따로 노는 법이잖아. 증오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은 못 하지만 애는 써보려고. 이제 더는 품지 말자. 이렇게 말해도 멀어진 채 응원할 게 훤해서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그래도 이제는 내려놓자. 너무 질기고 성긴 악연이야. 너가 그랬지, 낡고 못 쓰는 건 좀 갖다 버리라고. 여태까지 못 버리고 넣어둔 것들 엄청 많은데, 이번만큼은 버릴 수 있을 것도 같다.


다채롭게 ‘잘 지낸다’는 대답을 했던 너니까, 앞으로도 잘 지내길 바란다. 고마웠어. 벤티 사이즈의 커피도, 달콤했던 케이크도, 짭조름했던 우리의 날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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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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