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그때의 너와 나에게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는 건,
글 입력 2023.04.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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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는 잘 지내? 마시는 잃어버렸어. 어릴 적 꿈처럼 잊혔고, 사라져버렸어. 랑랑과는 더는 연락이 닿지 않아. 아직 바이올린을 켜고 있을까? 교환 일기를 누가 가지고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그건 아직 누군가의 곁에 있을까?


SNS에 가끔 네 이름을 검색해 봐. 마치 평행세계처럼 수많은 너의 가능성이 펼쳐지고, 나는 그중에 어떤 프로필도 눌러보지 못하고 그냥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 이상하게 겁이 난다. 나는 무엇이 두려운 걸까.


그날 주저하지 말고 네게 연락을 해볼 걸 그랬어.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동안 어떤 고민을 친구들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해왔는지 나는 가늠도 안 되더라. 이른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는 결정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서로 웃고 떠들며 보냈던 시간이 너에게는 큰 의미가 되지 못했던 걸까. 그런 아쉬움과 괜히 서운함이 들기도 했었어. 그래서 연락을 바로 못 했던 것 같아.


가끔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을 때마다 네 생각이 나. 둥근 이마를 덮은 앞머리와 하나로 묶어 올린 머리카락, 둥근 뺨과 코끝, 소복한 속눈썹 사이로 빛나던 네 눈, 손목을 띄운 채 가볍게 건반 위에 손을 올린, 네 옆모습. 나는 피아노 앞에 앉은 너에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지.

 

네가 처음 학교에서 피아노를 쳤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야. 난 우습게도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꽤 피아노를 잘 친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너는 정말 뭐랄까, 이렇게 표현하는 게 유치하겠지만, 압도적이었지. 그때 나는, 피아니스트는 저런 아이가 되는 거구나 생각했어. 나와 키 번호 1, 2번을 다투던 작은 아이가, 유난히 곧고 길던 손가락으로 연주하던 곡들이 아직도 기억나.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엄두도 못 낼 그런 기교가 필요한 곡들.


나는 굳게 믿었어. 너는 피아니스트가 되겠구나. 스포트라이트 아래 반질반질 윤이 나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서 네가 페달을 밟고, 건반을 두드리겠구나. 어릴 땐 말이야, 다들 자신감에 넘쳐서 뭐든 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곤 하잖아. 그때 나는 너를 보고 어쩌면 느꼈는지도 몰라. 언젠가는 내가 가진 꿈 중에 많은 것을 접어야 하겠구나. 세상에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걸.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많다는걸. 그때 나는 정확히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 미리 엿본 어른이 된 나에 대한 실망. 어렴풋한 쓰라림 속에서 규명하지 못한 마음. 초라함. 언젠가는 느꼈어야 할 마음을 그렇게 깨달은 거지.


나는 요즘 소설을 쓰고 있어. 예상 못 했지? 그때 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가수가 되고 싶어 했잖아. 곧 학교를 졸업하는데 뭘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 그저 막연히 소설을 계속 쓰고 싶어. 업으로도 말이야.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는데도. 얼마 전까지, 이렇게 자라고 싶지 않았다고 밤마다 자주 울었어. 마음은 이미 저 끝에 있는데 나는 아직 여기에서 허덕이고 있어서.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자꾸만 귓구멍에 고이는 탓에 몸을 뒤척이다가 잠에 들었지.


자주 너를 떠올려. 어린 나이에 꿈을 그만둔 너를. 그때 너는 많은 사람에게 인정도 받았고 상도 탔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었는지. 학교를 그만두는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 어른이 된 나는 포기해야 할 거 같은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 너는 어떻게 결정할 수 있었던 걸까.


요즘은 직업으로 해나가는 건 어렵겠다는 걸, 겨우겨우 인정하고 있어. 인정하고 꿈을 내려놓는 데까지 참 긴 시간이 걸리더라. 아직 완전히 내려놓지도 못했어. 난 고집이 세잖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 내려놓아도 글은 계속 쓸 수 있다는 걸 아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어서 매순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싶어 하면서, 다시 놓고 싶지 않아 해. 사탕 병에 손이 끼인 아이처럼. 보석 같은 사탕 알맹이를 주먹 가득 쥐고, 사탕을 놓으면 병에서 손을 뺄 수 있는데 고집을 부려. 내 입에 영영 들어오지 못할 것을. 어쩌면 작은 달콤함이라면 맛볼 수 있을 텐데 욕심을 부리면서.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는 건, 너무 아파. 


요즘도 피아노를 치고 있니? 지금 너는 뭘 꿈꾸고 사는지 궁금해. 닿지 않을 편지를 쓰면서 그때 네 마음을, 그리고 지금의 내 마음을 가늠해 보고 있어. 


얼마 전에 책을 읽었어. 김금희 작가의 <복자에게>라는 책이야. 이 책에 이런 문장이 나와. 


 

자기는 영상을 찍어서 그걸 직업으로 삼는 일보다 간직하는 일에 더 열의를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그건 어느 면에서나 실패가 아니라고.

“그래, 실패는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사표를 낸 것과 너가 더 이상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를 하지 않는 것.”

영웅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생각하더니 “글쎄, 그런 건 인생을 더 깊이 용인한다는 자세 아닐까?”라고 결론 내렸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누군가 이 문장을 나에게 조금만 더 일찍 주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했어. 그리고 한편으로, 지금 이 글이 와닿는 건 지금 내가 이걸 만날 준비가 되어서 그랬을 테니 늦게 만난 게 아니라는 생각도. 그때의 네 마음이 어땠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때의 너에게 이 문장을 주고 싶더라. 이 문장을 읽고 한참 네 생각을 했어. 네 동글동글하던 뒷모습, 그런 너를 닮은 네 아기곰인형 감자. 지금이라도 네게 이 문장을 건네볼게. 


올여름은 아주 무덥겠지. 사람의 체온보다, 숨결보다 더운 공기가 우리 사이를 늘 맴돌겠지. 어릴 적에 맞잡던 네 손의 온도를 떠올려 보며 여름을 기다려. 지금 보면 시답잖지만, 그땐 참 심각했던 이야기들. 우리를 웃게 만들던 작은 인형들. 


이 편지가 닿을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다시 편지할 수 있길 바라며,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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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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