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직 존재하지 않은 이름 [사람]

글 입력 2023.04.1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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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관계에 대해서 너무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많이 쏟는 것 같아.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만큼 솔직해지는 날들이 있고, 그날은 가깝게 지내던 대학 동기 한 명에게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저 밑바닥부터 긁어서 홀린 듯 털어놓게 된 날이었다. 나는 누군가 알게 된다면 기겁하며 한 발 물러날 정도로 잔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라는 것도, 내 인간관계에 깔린 그런 기저가 부담스럽게 여겨지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묘하게 입이 계속 움직였다(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동기는 비교적 최근의 인연이기에 오히려 홀가분할 수 있었던 듯하다). 한 번도 온전히 내보인 적 없는 내 바닥같은 부분을 목이 따끔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설명했다. 생각이 어떻게 꼬리를 무는지, 왜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를 얘기하는데, 나의 그런 구석이 스스로도 비합리적인 것 같아 답답함을 느껴왔으면서도 막상 내가 관계와 사람에 대해 '과하게' 생각한다는 반응은 꽤 의외다 싶던 기억이 난다.

 

내가 과한가. 보통은 모든 관계를 이렇게 깨질듯 다루지는 않는 건가. 모든 건 나의 '과함' 때문인 것 같다는 간단명료한 진단은 어딘가 속 시원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묘한 반발심이 드는 것이기도 했다. 어떻게 과하지 않을 수 있지. 생각해보면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했던 모든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불변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소중한 것들을, 사람들을 지금의 모습 그대로 박제해서 평생 쥐고있고 싶다는 그 마음이 유치한 것인 줄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놓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멀어지는 감각은 단순히 그 사람을 떠나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나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마련이기에, 한 관계의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섞여들어가서 나를 이뤄왔을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는 일과도 같았다.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사람들, 그들과 공유했던 시간과 기억들은 분명히 실재했고 그 실재하는 것들로 인해 나는 축적되듯 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그렇다. 누군가를 만나는 건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우리는 너무 고유하고 이 고유한 소우주들이 서로 마주하는 과정에선 어떤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마냥 좋을 수만도, 즐거울 수만도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피하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긴다. 더군다나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 그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어진다는 것은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불안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상대가 되었든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 나는 그에게 계속 호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상되는 숱한 상처와 충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견딜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내가 견뎌볼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언젠가 단절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상한 관계만큼 짓무르기 쉬운 것도 없으니 방치해서 천천히 썩혀두든, 잘라낼 결심을 하든. 그래서 관계 맺어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모든 불안과 불편과 단절의 상처를 감수하고서라도 이 사람과 엮여있고 싶다는 마음.


조금 단적인 표현을 쓴 것도 같지만, 그 관계가 건강한가와는 별개로 그저 너무나 고유한 두 개체가 만난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완전히 같을 수 없기에, 어찌됐든 우리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합일'이 아닌 '연결'의 과정이기에, 이 연결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더없이 질기다고 생각했던 인연마저도 외부의 일들에 맥없이 무너지거나, 특별한 계기 없이도 안에서부터 차츰 희미해지곤 했다. 새로운 사람을 들인다는 건 곧 새로운 상실의 가능성을 들이는 일이었다. 방어적인 사람의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이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 참 어려워졌다. 상실의 감각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감수할 결심을 끝마쳤는데, 이런 결심들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언제든 들이닥칠 수도 있다니. 떠나고 남겨지는 경험을 또 해야 할지도 모른다니.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피곤스러운 얘기다. 최상의 상태로 관계를 박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불안인 것도 같다. 이 피곤스러운 과정을 모두 거치고도 겨우 살아남아있는 관계들을, 다시 구축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으니까. 이런 관계의 불안정함을 더 민감하게 감지하거나 의식하는 쪽은 보통 전전긍긍하게 되고 나는 항상 그렇게 을을 자처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나의 성향을 시원스레 '과함'으로 요약하고 조금만 생각을 덜 하라는 처방을 내려줬던 그 동기처럼, 모두가 관계를 이런 방식으로 다루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나처럼 사람 때문에 매사 일희일비하고, 감정의 덩어리를 감당도 못할 만큼 수시로 키웠다가 줄였다가 하진 않는다. 이미 자각하고 있던 것이라 전술한 바가 있지만, 이런 고민들이 그저 '부담'이나 '삽질' 정도로 치부되는 맥락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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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성인이 되고 가장 적응할 수 없었던 사실은 각자의 세계가 넓어지는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는 점이었다. 당연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종일을 붙어있으면서 비슷하고 소소한 일상 모두를 꿰고 있던 친구들은, 각지로 흩어져 연락 없이는 소식을 알기 어려워졌다.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웠고, 한번 시간을 낼 수 있겠냐고 묻기가 점점 망설여졌다. 한창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 부딪혀보아야 하는 시기에, 내가 걸림돌이 될까봐. 넓어진 세계의 흔적들을 확인하는 건 곧 섣불리 우리의 관계를 우선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각별하더라도, 친구의 이름으로는 그런 서운함을 쉽게 토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한동안 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친구 관계에 국한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무리 연인이라 할지라도, 혹은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를 이루는 세계 중 나의 몫이 아닌 영역을 존중하며 한 발 물러나야 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간이 좀 지난 이제는 각자의 자리가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수용했다. 관계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내재적인 연약함을 가졌단 것도, 그래서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변화하지 않는 관계는 없고 생각지도 못한 일로 위태롭게 흔들릴 수 있단 것도. 그 연약한 것을 존속시키기 위해선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쏟고 가꾸어나가야 한다는 것도. 그런 정성을 쏟을 결심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도(그럴 기력을 모아 다른 일에 투자한다든지). 점점 심플해지는 관계의 성질이나, 돌아올 감정에 대해 지나치게 기대하지 않는 법 같은 것도. 이미 내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사안이기에 이렇게 글로 풀어낼 수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떤 명칭에 가두게 되면서, 여전히 명분이 없어 잘려나가는 감정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랬다.

 

생텍쥐페리 식의 ‘길들임’으로 요약이 되면 좋으련만 그것보다 조금 더 질척한 감정에 가까운데, 나는 책임 그 자체를 지고 싶다기보다는 책임질 권리를 가지고 싶었다. 내가 그를 감히 염려하고, 우선하고, 사랑할 수 있는 합당한 권리. 크기도 성질도 변덕스러운 내 감정의 덩어리가 그로 인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는 관계. 그런 관계의 이름이 항상 필요했다. 그 모든 상처와 슬픔,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집착에 불과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 이 관계의 존속에는 나의 몫이 있다고, 나는 그 책임을 다할 권리가, 애써볼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 시작과 존속, 느린 희미해짐 혹은 갑작스런 단절... 그 결말이 어떻든 나와 당신이 얽히거나 풀리는 모든 단계에서 그 어떤 과정도 일방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아주 단단한 이름. 사랑과 우정, 연인과 친구 따위로 양분되고 일축되지 않는 관계에 대한 언어가 필요했다.

  

여전히 과한가? 어쩌면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건 이렇게 오갈 데 없는 부담스러운 감정들의 명분 없음을 스스로 상기시키고 적절히 삭여낼 방법을 생각해내기 위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그런 완벽한 관계와 완벽한 명칭 같은 건 실재할 수 없는 이상일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이 과함을 쉽사리 놓을 수가 없다. 적어도 내가 그들의 세계에서 잠시 물러나야 하는 순간을 설명하는 이유가, 혹은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주저하게 되는 이유가 단지 우리의 세계를 거칠게 구분짓고 뭉뚱그려 버리는 단순한 명칭 때문만은 아니었으면 한다. 이런 이상적인 믿음을 굳이 품고 싶은 건, 내가 유독 관계 속에서 긴 호흡을 얻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내가 숨을 얻어간 만큼 그들이 나에게서 숨을 얻어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실 관계의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좋고 완벽한 명명같은 건 영영 이뤄질 수 없는 것이래도, 지금 내가 그를 염려하는 마음만큼은 진정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아직 존재하지 않은 언어에 대한 추구로써 말하고 싶다.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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