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른'이라는 가면을 쓰고 - 어쩌다 어른

글 입력 2023.04.1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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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산 것도 아니면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사는 것이 늘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또는 될 수 없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끝없이 걷는 과정이라고 느낀 적이 많다.


비평준화 지역에서 중학생 시절을 보내며 좋은 고등학교에 가면 모든 것이 좋게 바뀔 거라 믿었고, 고등학교에 간 다음에는 여느 고등학생처럼 좋은 대학을 위한 3년을 보냈다. 대학생 때는 어디든 다니며 돈을 번다면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일탈할 배짱도 없고 열정을 쏟아부을 꿈도 없이 정해진 길만 따라가다가 그렇게 20대 중반이 되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어느 미래에 내가 못 가져본 행복이, 모든 불안을 잠재울 만병통치약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의심스러워졌다. 이런 건 나와 같은 세대 사람들의 흔해 빠진 이야기라 더 쓰기도 민망해진다.


‘어른’이라는 것도 내게는 그런 ‘어느 미래’와 별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를 바라보던 마음으로 이제는 어른이라는 단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어른이 아니라고 우기기가 머쓱해지는 나이가 되었으니 중고등학생의 눈에 비친 나는 분명 어른일 테다. 하지만 정작 나는 뭐가 달라진 건지 잘 모르겠다. 실체 없이 추상적인 느낌으로만 존재하는 어른이라는 단어는 내가 가까이 다가갔다고 믿으면 다시 저만치 달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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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어른이라고 하기엔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영 불편하고, 그렇다고 어린이나 청소년이라는 단어 속으로 숨기엔 몸집이 너무 커져버린 이들이 ‘어쩌다 어른’이라는 제목에 열광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동명의 방송 프로그램이 유명한데, 사실 그 제목의 원조는 이영희 작가의 에세이집 『어쩌다 어른』이다. 2015년에 출간되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이 책이 출간 8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어쩌다 어른』은 그 제목처럼 어쩌다가 어른이라는 명칭을 부여받게 되었지만 사실은 그 단어가 낯설고 어려운 이영희 작가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회에서 부여한 어른의 가면을 쓰고는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이 그게 내 얼굴이 아니라는 생각에, 진짜 얼굴을 들킬지도 모른다며 전전긍긍한다. 이 책은 그런 독자들에게 너만 그런 것은 아닐 거라며 슬며시 말을 걸어 온다. 가볍게 읽히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만 이렇게 어른이 어렵고 낯선 것은 아니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데 이놈의 송곳은 왜 점점 무뎌지기만 하는지, 왜 뚫지 못해, 왜, 왜!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목도할 때마다 실망스러웠지만, 인정해야 했다. 30년 넘게 다짐해도 잘 안되는 걸 보면 이것이 나의 최선이며, 이제는 슬슬 그걸 인정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44쪽, 「언젠가 최선을 다해야 하리」

 


사실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른이 되는 것은 과연 어떤 건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어쩌다 보니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어 버렸고, 몸은 조금씩 노화의 징후를 보이는데, 마음은 여전히 말랑해서 작은 스침에도 쉽게 상처가 난다. 

 

172쪽, 「어쩌다 어른」

 

 

 

책을 쓰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성취한 것에 대해 쓰기 마련이다. 그런 책에서는 실패의 경험도 성공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조명 역할을 한다. 반면 이 책에는 극적인 성공도 실패도 없다. 특별한 사람이 될 줄 알았지만 이름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소회, 보통의 기쁨과 슬픔을 품고 그저 그렇게 굴러가는 일상이 꼭지마다 이어진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 작가의 일상과 마음은 우리가 ‘어른’ 하면 막연하게 떠올리는 훌륭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회사에 다니며 신입을 벗어난 지 오래지만 여전히 이게 맞는 건지 고민하는 순간의 연속이고, 나보다 앞서가는 또래를 만나면 조바심이 난다. 다른 사람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날도 많다. 가볍게 술술 읽어가다가도 멈칫하게 되는 건 때때로 내 마음과 너무 닮은 마음을 거기서 마주치기 때문이다. 미주알고주알 말하기에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지는 작디작은 마음이다. 


나보다 조금 먼저 살아본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 역시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 나는 고등학생 때 대학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미래를 상상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시간이 지나도 나는 나일 뿐이다. 지금의 고민을 그때는 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또 그때의 고민이 있을 테니 느끼는 불안의 총량은 큰 차이 없을 것 같다. 이상하게 그런 예감을 느끼며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걸 눈치채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어른의 덕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한편으로, ‘어쩌다 어른이 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털어놓는 작가가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상적인 어른이라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채 사회에서 이영희 작가를 만났다면 나는 분명 의심의 여지없이 그를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직장에서 인정받고, 회사 바깥에서도 다양한 관심사로 삶을 풍요롭게 채워나가는 중인 데다가, 무엇보다 이렇게 책까지 내지 않았는가. 


혹시 어른이라는 건 영영 내 얼굴이 될 수 없는 가면 같은 게 아닐까. 세상에 정체성이 ‘어른’인 사람은 없는 것이다. 능숙한 어른의 얼굴을 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그 아래에 자신만 아는 ‘어른답지 못한’ 얼굴을 감추고 있다. 오히려 자신이 어른이라고 의심 없이 선언하는 사람이 수상하다. 도대체 내가 뒤집어쓴 어른이라는 가면이 언제 내 얼굴이 되는지 초조해하던 나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어른이라는 게 특정한 시점을 지나서 되는 게 아니라 평생에 걸쳐 ‘되어가는’ 것이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면, 마음을 느긋하게 먹어보기로 한다. 어른과 완전히 거리가 멀 날도 있겠지만, 내가 봐도 놀랄 만큼 능숙하게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지의 띠지를 다시 보니 ‘어쩌다 어른이 된’ 뒤 괄호에 ‘되어가는’이 적혀 있다. 그렇구나. 책에서 깨달은 바가 이미 띠지에 적혀 있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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